[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⑧ 마주침의 발명… 시인 김행숙 기사의 사진

당신의 ‘호흡’에 섞여드는 나의 ‘호흡’

시선 자체가 사라지는 지점으로서의 포옹


김행숙(42) 시인은 초등학생 때까지 부산에서 성장했다. 초등학교를 두 번 들어갔는데 첫 입학했을 때 몸도 아프고 공포감도 있어서 긴 복도가 소용돌이치는 꿈을 꾸곤 했다고 한다. 한 달 정도 다니다 중퇴하고 이듬해 재입학한 그의 성장기엔 해변에 대한 기억이 깊게 새겨져 있다.

“어렸을 때/ 바닷가에서 보았던 익사체가 기억난다/ 갑자기!// 마구 키스를 퍼붓는 젊은 여자는/ 시체의 불타는 애인인가// 그녀에게 닥친 현실을 깨닫자 뒷걸음질치는 저 여인// 얼마나 멀어졌을까/ 어디서 무섭게 구역질을 하고 있을까/ 이제 보이지도 않는데/ 왜 그녀는 내게 이토록 친밀한가/ 우리 마을 사람도 아닌데/ 처음 본 얼굴인데// 그것은 나의 현실도 아니었는데/ 왜 완벽한가/ 어떤 꿈들은/ 어떻게 내 것이 돼 버렸는가”(‘누군가의 호흡’ 부분)

이 시에서 강조되고 있는 건 호흡이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익사한 사람의 마지막 호흡이 그것을 우연히 지켜본 ‘나’의 기억 속에 박혀서 여전히 마지막 호흡을 되풀이하고 있다. 마치 익사 직전의 사내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가 물 위로 떠오르기를 반복하고 있듯. 삶과 죽음이라는 두 세계를 교차로 드나드는 이 절대 절명의 호흡이 ‘나’에게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떠오른 익사자를 해변에 끌고 와 눕혔을 때, 마구 키스를 퍼붓다가 다음 순간에 그것이 이미 썩어가는 사체라는 것을 깨닫고 무섭게 구역질을 하는 그녀가 등장한다. 익사자의 애인이라는 그녀. 단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사랑으로 불타고 있던 그녀. 그런데 시적 화자는 마치 빙의에 걸린 듯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그녀가 친밀하게 느껴지고, 나의 현실도 아닌 그 이질적인 익사 현장에 자신을 세워놓고 있다. 익사 현장에 서 있던 여인의 구역질하는 순간만이 바로 김행숙이 기다리던 시적인 순간이라는 듯.

그런데 처음 본 얼굴의 그 여인이 출몰하는 어떤 꿈은 왜 이토록 친밀한가. 그건 ‘나’라는 자아로부터 가볍게 이탈해 꿈에 보이는 익사자의 마지막 호흡까지 아우르는 어떤 총체성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는 이렇듯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세계가 없고, 우리가 믿고 있는 그 자아가 없다. 둘은 분리된 채로 뒤섞였다가 나눠지고, 모였다가 흩어지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보여 준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포옹’ 부분)

포옹은 ‘나’와 ‘너’가 신체적으로 밀착되는 물리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포옹은 ‘나’와 ‘너’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지는 못한다. 한없이 가까이 다가간다 해도 ‘사이’는 남는다. ‘나’와 ‘너’의 몸은 그 ‘사이’에서 ‘교차’할 뿐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너’는 보이지 않는다. 포옹은 역설적으로 시선 자체가 무화되는 지점을 의미한다. 그래서 포옹은 온전히 하나됨의 불가능성을 담고 있다. 포옹이라는 밀착 행위마저 ‘사이’가 있다는 것을 김행숙은 마주침의 발명으로 감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눈빛을 던지고 있는 타인은 여전히 아주 먼 곳에서 출발한 자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나’와 ‘너’가 만나는 일은 결코 쉴 수 없는 여행인 것이다. 김행숙은 이렇게 말한다. “너무 가까이서 뭘 보면 형체가 뭉개져서 안 보이잖아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는 대상을 파악하고 객관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죠. 가까이 가면 갈수록 타인과 결코 합일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경험하게 되죠.”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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