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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고승욱] 트위터와 트윗

[데스크시각-고승욱] 트위터와 트윗 기사의 사진

없으면 나라님도 욕한다는 말이 있다. 회식자리 최고의 안주는 단연 직장 상사 뒷담화인 것처럼 동료나 친구들과 둘러앉아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죽고 못 사는 삼총사도 한 명이 없으면 흉을 본다. 나중에 흉 본 이야기가 전해져도 ‘억울하면 빠지지 말지’라는 말로 웃고 넘어간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말이 글로 바뀌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꼼수’ 진행자로 서울 노원갑에 출마한 김용민 후보가 8년 전 인터넷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한 말은 차마 옮겨 적을 수 없다. 이 말을 적은 글을 인터넷에서 봤을 때 ‘역겹다’ 말고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 유튜브로 동영상을 봤거나 방송을 직접 들었다면 그 역겨움은 좀 덜했을지 모른다. 말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만 글로 바뀌었을 때만큼 후유증이 크지는 않다. 누구든 언제나 꺼내 읽을 수 있다면 더 심각하다. 글에는 전후를 설명할 겨를이 없다. 글은 기록이고, 기록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사적인 이야기를 담는 공간이었다. 실명에 기초하고, 공동의 관심사를 공유하자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내 감정을 적는다. 멀리 있는 친구도 내 글을 보고 연락을 해 온다. 이보다 편한 도구가 없다. 그 편리함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중동의 민주화를 이끌었다. 짧지만 강하게, 무엇보다 빠르게 내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전달됐다.

이후 SNS는 더 넓은 소통의 장으로 진화했다. 누구나 미디어 매체를 소유하는 1인 미디어시대가 열렸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발행부수는 90만부 정도다. 레이디 가가의 트위터 팔로어는 1000만명이 넘는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제동씨의 트위터 팔로어는 50만명을 육박한다. 김씨를 직접 팔로잉하지 않아도 그의 글을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재전송되면서 결국 내 트위터에 김씨의 글이 오른다.

트위터가 이미 친구들과의 수다를 뛰어넘은 것이다. 4·11 총선에 출마한 후보 중 아무나 한 사람의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곧바로 그 사람에 대한 트위터 글이 나온다.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쓴 이 글을 보고 후보의 적격 여부를 판단하기도 한다. 하지만 글의 내용은 비방이 대부분이다. 후보를 검증하기 위한 문제제기?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현? 아무리 봐도 그렇게 읽히지 않는 글이 많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12월 현행 공직선거법을 적용해 트위터를 통한 의사표현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헌재 결정 이후 허위사실 유포와 특정후보자 비방만큼은 철저히 막겠다고 했다. 하지만 몇몇 사실(fact) 사이에 교묘히 숨겨져 있는 거짓은 트위터 공간을 뛰어나와 우리 사회에서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선거 결과를 바꾸기도 했다. 뒤늦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소용없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최소한 세 번의 게이트키핑을 거치는 신문도 종종 사실 속에 숨어 있는 거짓을 찾아내지 못해 오류를 범한다. 교활한 사람은 이를 이용한다. 어리석거나 마음이 곧은 사람은 이용당하는 줄 모르는 채 분노한다.

민주주의는 참여에 기반한다. SNS는 참여를 이끄는 훌륭한 도구다. 그런데 부작용이 긍정적인 효과를 덮기 시작했다. 법은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한다. 결국 이용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았다. 최소한 객관적인 사실과 거짓을 구별하겠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특정한 내용만 심하게 부각시킨 정보를 균형 있게 바라볼 능력도 있어야 한다. 거짓에 현혹돼 잘못된 믿음을 가져서도 곤란하다. 트위터(twitter)를 이용하는 것을 속어로 ‘트윗질’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잘못 사용한 트윗(twit)이라는 말은 멍청이라는 뜻이다.

고승욱 사회부장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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