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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59) 일제 하에서의 신학교육

[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59) 일제 하에서의 신학교육 기사의 사진

한국인에 의한 주체적 신학교육 체계화

장로교의 경우 1901년 설립된 장로회교회신학교, 곧 평양신학교는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폐교되었다. 1907년 첫 졸업생 7명을 배출한 이래 1920년까지 26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1938년까지 746명을 배출했다. 이 학교는 1938년 9월 20일 개학 예정이었으나 그해 9월 10일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됨으로써 개학은 무기연기 되었고, 결국 폐교의 길을 갔다.

3학년 1학기를 마친 52명은 통신으로 공부하여 1939년 3월 28일자로 졸업생으로 인정되었고 증서는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이들이 34회 졸업생인데, 이들까지 합하면 평양신학교는 798명을 배출한 셈이다. 장로교회의 신학교육이 폐쇄되자 일제 말기 평양과 만주, 서울에서는 새로운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평양신학교=평양신학교가 사실상 폐교되자 1938년 10월부터 한국인의 신학교로 다시 개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39년 2월 3일 평양 서문밖 교회당에서 모인 신학교육부는 선교부와 무관한 총회 직영의 신학교 개교를 결의했다. 그리고는 종전의 평양신학교 시설과 설비의 인계를 주한 4선교부에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캐나다 선교부는 총회 직영을 찬성했으나 다른 선교부는 선교연합공의회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선교공의회는 인계를 거부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순응적이었던 이들은 평안남도청 학무과의 인가를 받고(1939.2.8) 1939년 4월 11일 새로운 평양신학교를 개교했다.

교장에는 채필근(蔡弼近, 1885∼1973) 목사가 취임했고, 교수는 고려위(高麗偉) 다나카(田中理夫), 강사는 이승길(李承吉) 김관식(金觀植) 사이토(齊藤佑), 야마모토(山本新) 등이었다. 평양 반교리의 동덕학교 교사를 임시교사로 사용하다가 1939년 2학기부터 마포삼열기념관과 서문밖 교회당 하층을 이용했다. 정식 개교하기 전인 1938년 10월25일부터 한 학기 공부한 9명에게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이 학교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6회에 걸쳐 16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공산 치하에서 폐교되었다.

◇만주신학교=신사참배가 가결된 이후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들은 해외로 이주하거나 망명했다. 어떤 이들은 목회를 그만 두고 초야에 묻혀 사는 인퇴(引退)의 길을 가기도 했다. 해외로 도피한 대표적인 인물은 박형룡이었다. 그는 일본을 거처 1941년 만주에 정착했다. 박윤선의 제2차 유학(1938∼39)은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유학을 마친 그는 1939년 10월 일본에 도착했고, 곧 다시 만주로 이주하였다. 1936년 당시 만주의 한인수는 87만5000명으로 추산되는데 그 수는 증가되었다. 1943년경에는 기독교 신자수가 15만 명에 달했다. 1940년 당시 만주에는 장로교를 비롯하여 감리교, 성결교, 동아기독교, 변성옥 중심의 조선기독교 등 5개 교파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교파는 연합하여 ‘만주 조선기독교회’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로교회가 주된 교회로써 동만노회(간도중심), 북만노회, 남만노회, 봉천노회, 안동노회, 영구노회 등 6개 노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만주의 기독교회는 연합하여 1941년 신학교를 설립했는데 그것이 만주신학교였다. 이 에큐메니컬 신학교는 동북신학교 혹은 봉천신학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학교는 봉천의 서탑(西塔)교회에서 개교하였으나 1942년 봉천시 황구룬구 대원가에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교장은 정상인 목사였고 교수는 박형룡 박윤선 기구치 유이치(菊地雄一), 강사는 김선두 안광국 이성두 경창봉 그리고 일본조합교회 목사였던 와다나베(渡邊) 등이었다. 학생수는 50∼70명 정도였고, 3회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짧은 기간 존속했으나 김치묵 남영환 백리언 이응화 전병홍 정찬준 황금천 등의 목사를 배출했다. 문동환과 문익환 형제도 이 학교에서 수학한 바 있다. 비록 박형룡은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해 만주로 이주했으나 이 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지 못했다.

◇조선신학교=평양의 장로교 신학교가 폐쇄되자 1939년 초 채필근을 대표로 김우현 송창근 채필근 함태영 목사 등은 서울에 장로교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해 3월 27일 ‘장로회신학교 설립 기성회 실행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한국인에 의한 주체적 신학교육을 기치로 내걸고, 서울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가 기부한 30만원으로 학교 재단을 형성했다. 설립자겸 이사장은 김대현 장로, 이사는 김관식 김길창 김영주 김영철 오진영 윤인구 조희염 한경직 함태영 등이었다. 이 학교는 1940년 4월 ‘조선신학원’이란 이름으로 승동교회에서 개교하였고, 전임교수는 김재준 윤인구 그리고 서울의 일본인조합교회 목사였던 미야우치 아키라(宮內彰)였다. 채필근 목사는 ‘장로회신학교 설립 기성회 실행위원회’ 위원장이었으나 곧 평양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새로운 신학교 설립에 가담하였다.

조선신학원의 첫 입학생 53명 중 다수는 평양신학교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개원당시 김재준 교수는 학문연구의 자유와 성경비평학의 수용, 그리고 ‘교회의 건설적인 실제면을 고려하는 신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전의 평양신학교와는 다른 신학교육을 주창했다. 김대현 장로에 이어 윤인구 목사가 2대원장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였고 조선신학교는 김재준 목사가 주도하였다.

1943년 첫 학기는 서울 냉천동의 감리교신학교 교사에서 합동수업을 하기도 했다. 조선신학교는 1945년까지 5회에 걸쳐 12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해방당시 유일한 장로교계 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는 1946년 6월 12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한 남부총회에서 직영신학교로 가결되었다. 이것은 후일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신학교 논쟁의 시발점이 된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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