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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김준동] 64년 만의 런던 올림픽

[데스크시각-김준동] 64년 만의 런던 올림픽 기사의 사진

영국 런던은 한국 올림픽 역사와 인연이 깊은 도시다. 우리나라가 ‘KOREA’라는 독립국으로 처음 출전한 제 14회 올림픽이 1948년 바로 런던에서 열렸다.

런던 행 장도에 오르기 위해 육상 축구 농구 복싱 역도 레슬링 사이클 등 7개 종목에서 67명(선수 50, 임원 17)의 선수단이 꾸려졌다. 그해 6월 21일 서울 종로2가 YMCA 회관에 집결한 태극 전사들은 서울역까지 가두 행진을 벌였다. 거리에 나온 시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일장기를 달고 뛰던 시대는 지났다. 이기고 돌아오라”고 뜨겁게 성원했다.

하지만 런던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여비가 넉넉하지 않아 67명의 선수단은 부산에서 출발해 하카타-요코하마(이상 일본)∼상하이(중국)∼홍콩까지는 배를 탔다. 홍콩에서 비행기를 탔지만 방콕(태국)∼콜카타∼뭄바이(이상 인도)∼바드다드(이라크)∼카이로(이집트)∼로마(이탈리아)∼암스테르담(네덜란드)을 차례로 경유하고 무려 20일 만에야 런던에 도착했다.

9개국을 거쳐 안착한 영국 런던은 2차 세계대전 후유증으로 변변한 숙소가 없었다. 선수들은 경기장 인근 학교의 교실에 놓인 야전침대에서 단체로 새우잠을 잤고, 학교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7월 29일 개막식은 엠파이어 스타디움(구 웸블리구장)에서 열렸다. 한국의 기수(旗手)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었다.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손 선수는 대형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트랙을 돌았다. 선수들은 모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당시 대회에 출전했던 김성집(93) 대한체육회 고문은 “36년의 식민지를 끝내고 우리 국호와 국기를 세우고 처음 올림픽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눈물이 났다”고 회상했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선수들의 투혼은 빛났다. 김 고문은 남자 역도 75㎏급에 출전해 합계 380㎏을 들어 올리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한민국 올림픽 1호 메달이었다. 이어 복싱 플라이급에서 한수안도 동메달 하나를 추가했다.

런던에서 씨앗이 뿌려진 후 한국은 동·하계 올림픽에서 모두 금메달 103개, 은메달 88개, 동메달 258개를 수확했다. 위상도 달라졌다. 80년대 초반까지 참가에만 의미를 두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스포츠 강국으로 세계 스포츠 계를 당당히 호령하고 있다.

그리고 64년이 흐른 2012년 7월 27일 런던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린다. 67명에 불과했던 선수단은 400여명으로 늘어났다. 산 넘고 물 건너 장장 20일 만에 도착했던 예전과 달리 이제 우리 선수들은 전세기를 타고 편안하게 런던으로 곧바로 날아간다.

64년 전에는 변변한 숙소가 없었지만 지금은 대학 한 곳을 통째로 빌려 숙식과 훈련을 해결한다. 주방과 식당, 100여 개의 방을 갖춘 대학 기숙사와 체육관 전부도 빌렸다. 태릉선수촌을 통째로 런던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목표도 금메달 10개 이상을 따 올림픽 3회 연속 종합 10위에 진입하는 ‘10-10’이다.

30회 런던 올림픽 개막이 불과 91일 남았다.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하계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던 그 런던에서 인류의 스포츠 대제전이 다시 벌어진다.

열악한 상황에서 금메달 못지않은 값진 동메달 2개를 따냈던 선배들의 그 투혼을 후배들이 이어갈 때다. 단복도 ‘영광재현! 1948’을 콘셉트로 당시 선배들이 입었던 단복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됐다. 열악한 환경에도 선배들이 런던에서 남긴 업적을 64년 만에 후배들이 재현해주길 기대한다.

김준동 체육부장 jd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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