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길 기사의 사진

“패권적 욕망에 사로잡힌 지금의 진보진영은 미래의 큰 길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사회주의 진영의 정신적 지주로 꼽히는 중국 작가 노신(魯迅)이 말했듯 길은 “희망처럼 본래 없었던 것, 아무 것도 없던 땅에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만들어지는 것”이다. 누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길의 전통과 역사가 생겨난다는 얘기다.

이런 예가 있다. 미국 북동부 대부분 고속도로의 기초를 닦은 사람들은 원주민인 인디언들이었다고 한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미국 땅으로 오기 수백년 전에 황무지를 가로질러 폭 30∼45㎝의 오솔길을 건설했고 사람들은 한 줄로 그 길을 통행했었다. 그 후 말들이 지나다니며 폭이 넓어졌고 마차가 등장해 오솔길이 비포장도로로 변했다. 자동차가 생겨나면서는 고속도로로 변화되었다. 길은 방향과 전통의 소산(所産)이다.

한 달 이상 대들보가 무너지도록 집안싸움을 벌이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내분을 보면서 앞으로 진보정당의 길이 어떻게 만들어질지를 생각해본다. 진보정당의 분열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08년 일심회 사건을 계기로 분열되었던 PD(민중민주계열)과 NL(민족해방파)의 갈등이 이념투쟁을 바탕으로 한 패권다툼이었다면 이번 갈등 또한 비례대표 선출과정에서의 부정선거 논란을 바탕으로 한 당권파(현 구당권파)와 비당권파(현 신당권파)의 패권다툼이 그 본질이다.

이번 싸움의 해법은 1차적으로 양대 파벌이 당내 결정을 따르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민적 여론이 들끓고 당이 쪼개질 망정 이 해법은 도외시되고 있다. 그리고 진보진영에서 이명박 정권을 비판해왔던 내용 그대로 국민을 속이거나 무시하고 있고,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며 누구의 말도 경청하지 않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유권자들은 4·11 총선을 앞두고 이뤄졌던 진보진영의 통합이 이념과 정책연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회 의석에 대한 욕망으로 결합된 것임을 분명하게 알게 됐다. 이들의 목적이 지금까지 외쳐온 어떤 진보적 가치보다도 당내 권력쟁취가 우선이었다는 것, 그 과정에서 보여준 내부 민주주의적 질서는 우리나라 최하위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 쯤 되면 우리사회 진보진영이 개척해 낼 수 있는 길은 고속도로가 되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신이 말한 대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쪽으로 사람들은 걸어가지 않을 것이고, 그런 황무지는 큰 길의 전통과 양식을 확립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새로운 길의 특징은 미지로 향하는 개척의 고단함이거나 우리의 삶을 고양시키는 순례에 대한 유혹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 순수해 보이는 오솔길의 초입이 백일하에 드러난 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패권적 혈투와 아집으로 싸우는 곳이라면 사람들이 그 길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진보정치진영이 우선적으로 할 일은 강물에 손을 씻고 마을의 소리를 경청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국토해양부가 발표한 2011년 말 우리나라 도로연장은 10만5931㎞로 나타났다. 4㎞를 십리로 치는 우리나라 전통적 거리환산법으로 26만480리에 해당된다. 참 멀고 아득한 길의 역사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도로연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짧다. 일본은 우리의 11배가 넘는 120만7867㎞, 미국은 60배가 넘는 654만5839㎞라고 한다. 우리나라 진보정치의 길도 선진국과 비교하면 이런 비례만큼 짧다.

어디나 길은 설레게 한다. 한번 유폐(幽閉)되면 평생 걸어도 도시까지는 이를 수 없을 듯한, 비행기 상공에서 내려다보이는 중국이나 아프가니스탄의 깊은 산협(山峽) 도로는 말 할 것도 없으려니와 도시 외곽의 둘레길조차도 길은 생명으로 살아있다. 더구나 가난한 도시 노동자와 농민을 사랑하는 진보적 가치의 오솔길은 더없는 신선함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곳이 실상은 계속되는 내부 싸움과 불통이 되풀이되는 미로라면 우리 시대의 진보들은 길을 막은 역사적 과오에 대해 깊이 사죄해야 한다. 이 대청소를 진보진영이 할 수 있을 것인가.

임순만 편집인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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