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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한민수] 누군가는 제동 걸었어야

[데스크시각-한민수] 누군가는 제동 걸었어야 기사의 사진

“이건 양아치 조직도 아니고…”

진경락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이 작성했다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추진 지휘체계’ 문건을 접하고 든 첫 느낌이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노무현 정권 인사들의 음성적 저항 등으로 VIP(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차질이 빚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설립됐다’는 대목을 지나 총리실 산하에 뒀지만 오직 ‘VIP에게만 일심(一心)으로 충성하는 친위조직이 비선에서 총괄 지휘한다’는 대목을 읽을 때는 분노를 넘어 허탈해졌다.

몇 개 단어만 바꾸면 된다. VIP를 두목으로, 노무현 정권을 타 조직, 국정수행을 조직관리 등으로. 그러면 영락없는 조직폭력배 강령이다.

역대 정권에도 친위 세력은 있었다. 김영삼 정권 때 상도동계, 김대중 정권에서는 동교동계, 노무현 정권 때는 ‘386’이 존재했다. 이들이 월권을 하거나 대통령을 팔아 국정을 농단해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다. 진입 장벽이 있어 패거리로 보이기도 했다.

과거 DJ 집권 시기에 만났던 동교동계 실세가 주군(主君)에 대한 충성심이 과해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와 같이 황당무계한 문건을 만들어 조직을 운영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질 못했다.

2008년 상반기 MB정권 핵심 인사가 사적인 자리에서 정권 운영과 관련해 ‘고충’을 토로했다. “노무현 정권 386들이 대단해 보인다. 공무원 조직을 확 틀어쥐고 강력하게 밀어붙이니까 다들 꼼짝을 못한 것 같다. 근데 우리 정권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다”. 그의 말대로 현 정권 상층부에서 절대적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친위조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공직윤리지원관실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든다.

뭐 문건을 만들든, 충성맹세 서약서를 쓰든 한 동네(영포라인) 친구들이 객기를 부리는 데 그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심각성은 이들이 강령을 철저히 신봉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데 있다. 진 전 과장을 비롯한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이 공직자는 물론 여야 국회의원, 민간인까지 무차별 사찰을 했다는 게 검찰 수사로 속속 드러난 상황이다. 이들은 ‘일상적인 공직기강 업무는 총리가 지휘하되 특명사항은 VIP께 절대 충성하는 친위조직이 비선에서 지휘한다’는 글귀를 매일 읽으며 불법 사찰을 해오지 않았을까.

21세기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실에 이런 강령을 들고 일하는 공무원 조직이 있었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과연 이 문건을 작성하면서 진 전 과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행정고시에 합격해 고용노동부와 청와대에서 근무한 인물이다. 조직을 관리한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동비서관과 이렇게 만들어진 불법사찰의 결과물을 접한 윗선의 ‘높으신 분들’은 기분이 어땠을까.

작은 회사 조직이든 정부든 근간은 사람이다. 아무리 시스템이 잘 돼 있어도 이를 운용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어느 누군가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문건이 생산될 때 제동을 걸었어야 했다. 진 전 과장이 스스로 알아서 작성했는지, 아니면 상사가 지시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과 이 전 비서관, 현 정권 실세들은 이 문건 실체와 내용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상적인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진작 문제를 제기하고 멈췄어야 했다. 그랬다면 우리 사회의 수준을 십수 년 이상 퇴보시킨 이런 ‘양아치 문건’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게다.

한민수 정치부장 ms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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