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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1) 잔느 귀용 ① 자기 포기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1) 잔느 귀용 ① 자기 포기 기사의 사진

사랑·자유 등 모두 빼앗긴 빈자리에 예수님을 채웠다

떼제를 떠나 독일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낮은 언덕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는 초원의 양떼, 소담스러운 포도원의 풍경은 이곳이 바로 프랑스의 아름다운 전원임을 알게 했다. 독일 칼스루에까지 6시간, 그러나 그 6시간이 필자에게 좋은 시간만은 아니었다. 프랑스에 오면 반드시 찾아보고 싶은 인물 하나를 놓고 가기 때문이다.

잔느 귀용. 오래 전 한국의 어느 서점에서 우연히 그가 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를 읽었다. 그때 300년 전 프랑스에 이런 사람이 있었는가 하고 깜짝 놀란 후 귀용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프랑스에 가면 반드시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바쁜 일정상 그럴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프랑스에 가면 읽으리라 생각한 귀용의 책들을 다시 꺼냈다. 정말 귀용만큼 인생의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성경의 욥을 제외하고 그만큼 인생고를 많이 겪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고난만 많이 겪은 것이 아니라 고난의 풀무불에서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 그래서 정금같이 단련된 사람, 그는 정말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은 사람이었다.

귀용은 1648년 프랑스 파리 몽타르지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났다. 7개월 조산아로 태어난 귀용은 평생 연약한 몸으로 살아야 했다. 그의 본격적인 불행은 16세의 나이에 22살이나 연상인 귀족 자크 귀용과 결혼하면서 시작되었다. 결혼 첫날부터 귀용은 남편 병 수발과 괴퍅한 시어머니의 학대를 견뎌내야만 했고 곧 무서운 전염병으로 두 아들과 딸을 잃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죽자 재산까지 다 빼앗기고 만다.

그러나 귀용의 가장 큰 고난은 그를 이단으로 몰아 감옥에 가둔 사람들 때문에 왔다. 1695년 그는 루이 14세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고 체포돼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다. 7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도 귀용은 다시 붙잡혀 프랑스 중부 블루아 지역에서 아들과 함께 길고 긴 유배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가?(롬 5:20).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 오해와 정죄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순전한 사랑은 깊어만 갔다. 그는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침묵과 묵상을 통해 주님과 만나는 일을 쉬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고난을 이겨내고 순금 같이 되어 교회사를 빛내는 인물이 되었다.

드디어 1717년 6월 9일. 귀용은 한 많은 세상을 뒤로 하고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의 품에 안겼다. 칠흑 같은 고난을 통해 귀용이 발견한 첫 번째 진주 같은 영적 보화는 ‘자기포기’의 보화였다. 처음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자기 포기는 처음부터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삶의 여러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빼앗기고 살았다. 어릴 때는 동생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빼앗겼다. 결혼한 후에는 오해와 불신으로 남편과 시어머니의 사랑을 빼앗기고 살았다. 병으로 자녀를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고, 감옥에 갇혀 자유롭게 살 권리도 빼앗기고, 무엇보다 마음껏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적 자유를 빼앗겼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자기 포기는 그에게 행복한 은혜의 선택이 되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이유는 우선 그 자신 안에 있는 죄성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곡식처럼 쭉정이에서 분리된 알곡과도 같았다. 곡식은 식물이 되기 위해서 쭉정이와 분리된 후 잘게 부서지고 빻아진다. 하나님의 사람도 쓰임받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어 버려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매일 죽는 법을 배움으로써만 가능하다. 우리의 옛 자아는 항상 자기 죽음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단 죽으면 영은 자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나아간다. 성경은 이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자기 포기 자체가 자기 포기의 목적이 아니다. 자기 포기는 우리가 주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 주님이 임재하는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열쇠가 곧 자기 포기다. 따라서 자기 포기란 곧 자기의 모든 염려를 던져 버리는 것이다. 자기 포기란 자기의 모든 필요, 곧 자신의 모든 문제를 떨쳐 버리는 것이다. 자기 포기란 자신의 모든 영적인 문제들을 영원히 옆으로 제쳐놓는 것이다. 자기 포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해질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귀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원저:기도의 방법, 1685)에서 자기 포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기 포기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잊어버리고, 미래의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현재의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순간의 하나님에 대해 만족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 포기가 단순히 비이기적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이기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과거의 자기 포기는 ‘비이기심’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답을 얻는다면 자기 포기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비이기심은 내가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가 없이 지내는 것이다. 내가 나 없이 지낸다고 하나님을 소유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우리 마음에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본성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의 본성 때문에 자신에 대해 죽는 과정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꺼번에 변화될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포기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다. 자신이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포기해야 한다. 심오한 것들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단순한 것들을 즐거워해야 한다. 모든 자의식과 불안이 자기 사랑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도 비난하지 말아야 할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어떠한 변명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귀용은 그의 책에서 자기 포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에 대하여 전적으로 죽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모두 죽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여러분 자아의 죽음을 통해서만 그분을 소유하길 갈망합니다.” “자기애를 통해서 어떤 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나에게 채찍과 핍박과 불명예와 천함과 자아의 죽음은 나에게 요구된 하나님의 영적 결혼지참금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십자가는 자기 포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렇다. 자기 포기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귀용은 고난에 찬 삶의 모든 역정을 통해 자기 포기의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었다.

<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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