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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정식] 섬세함을 위한 변명

[삶의 향기-차정식] 섬세함을 위한 변명 기사의 사진

날씨 좋은 주말, 산악자전거를 싣고 도시 외곽의 산을 찾았다. 임도를 따라 탐험해보고 싶은 코스가 있었는데, 아뿔싸, 입구에 도착하니 난감한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임도 확장을 위한 발파작업으로 위험하니 6개월 동안 일반인 출입을 금하며 위반으로 인한 불상사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내가 매사에 이런 엄포성 경고에 주눅 들어 그저 지시하는 대로 사는 ‘범생이’도 못되지만 거기까지 찾아갔는데 포기하자니 허탈할 것 같았다.

그래서 경고 표지를 무시하고 길 위로 접어들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한 시간 가까이 숲길을 따라 오르는데 다람쥐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미 닦아놓은 임도가 끝나고 산 정상의 모퉁이에서 새로 닦은 길을 타고 방향을 틀 때 그 산 너머에서 아득하니 폭발음이 딱 한 차례 들려왔다. 나중에 만난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임도확장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모양이었다.

좀 더 배려할 수 있었을 텐데

코스의 절반을 찜하고 되돌아 내려오면서 나는 이 아름다운 숲길에서 자연을 즐겨보려는 산책자의 출입을 입구부터 봉쇄하는 것이 과연 최선의 방책일까 생각해보았다. 매일 발파작업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테고, 더구나 발파작업은 이 코스의 절반 지난 산 너머에서 진행되어 왔는데 왜 발파작업과 전혀 무관한 그 반쪽마저 봉쇄해 놓아야 했을까. 그 플래카드를 정상 근처에 달아놓았더라면 그 길을 절반쯤 충분히 즐길 자유가 일반인들에게 제공되었을 텐데 말이다. 굳이 행정편의주의의 관료적 행태라며 성급하게 타박하고 싶지 않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넘어갈 수도 있다.

다만 내 마음 속 아쉬움은 섬세함을 위한 배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한 배려는, 가령 고속도로 보수공사로 한 차선이 10㎞나 폐쇄된 구간에서 모든 공사가 다 완료되기 전 먼저 공사가 끝난 5㎞ 구간에 공사표지물을 제거하여 혼잡한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운전자들의 심정을 달래주는 마음 씀씀이 같은 것이다. 공중화장실 남성 소변기에서 한 발짝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는 몸짓도 섬세한 마음으로 내 뒤의 타인을 배려하는 센스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상황에서 타인에게 도움이 되도록 조금 더 배려함으로써 우리의 섬세함은 기쁨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헤아리시는 세밀한 분별력을 지닌 분으로 묘사된다. 그분의 전지전능은 교리적 강령이기에 앞서 우리의 부족함을 향한 웅숭깊은 배려일 듯싶다. 심지어 그분은 풀 한 포기의 신진대사와 공중의 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일에도 관여하실 정도로 섬세하다고 하지 않던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사소한 가치, 하찮은 생명의 상실을 안타까이 여기며 그것의 회복을 꿈꾸는 비전과 함께 이 땅에 임한다. 그것이 지상의 국가와 사회에 적용되어 섬세하게 드러날 때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식수준도 선진화될 수 있다.

머리털 헤아리는 분별력 필요

이처럼 섬세한 타자의식의 고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선진국의 품격은 완성된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투박한 대로 그럭저럭 견디면 그만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사람살이는 뭔가 다르고 인간사회에서 관계의 지형은 늘 복합적이다. 투박함이 섬세함으로 거듭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삶은 여유 가운데 무르익고 윤기를 발한다. 섬세함은 잠시 발걸음을 멈춰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2%의 바로 그 여유에서 싹튼다.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신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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