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69) 남한에서 교회재건 ②

[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69) 남한에서 교회재건 ② 기사의 사진

분열 위기 감리교, 평신도들 노력으로 통합

해방 후 감리교회에도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1945년 9월 8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인사들이 이 조직의 존속을 시도하여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남부대회란 이름으로 교단대회를 소집했다. 이때 재야 교직자들이었던 감리교의 김광우 박연서 변홍규 이규갑 목사 등은 이 대회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퇴장했다. 이들은 이날 서울 동대문교회에 모여 ‘감리교재건중앙위원회’를 조직, 이규갑(李奎甲·1887-1970) 목사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 목사는 상해임시정부, 신간회 등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출신 목사였다.

이들은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에 참여했던 인사들과는 달리 감리교회의 완전한 재건을 시도했다. 재건중앙위원회는 동·서·중의 3부 연회를 조직한 후 동부연회에는 변홍규 목사, 중부연회에는 이규갑 목사, 서부연회에는 이윤영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또 46년 1월에는 감리교신학교를 재건하고 변홍규 목사를 교장으로 임명했다. 이들이 흔히 ‘재건파’로 불리는데, 이런 쇄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호응은 크지 않았다. 재건파가 주도하는 3부 연합연회에 가담한 교회는 70여개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재건파 인사들이 일제말기 친일적인 교단에 의해 휴직되거나 파면돼 교회를 담임하지 못했고 교회 행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건파를 반대한 이들은 ‘부흥측’이라고 불리는데 이들도 교회재건을 시도했다. 부흥측 인사들은 46년 4월 7일 강태희(姜泰熙) 목사를 중심으로 서울 수표교 감리교회에 모여 ‘기독교조선감리회 부흥신도대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감리교 부흥 및 수습대책에 있어 감리회의 전통 헌장과 신도의 여론을 존중하여 합리적이고 타당한 방도를 취하되 양심과 이론에 호소하여 실시되기를 희구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재건파와는 별도로 47년 1월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조직하고 강태희 목사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반면 재건파는 48년 1월 23일 “조선감리회의 역사적 신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취지에서 장석영(張錫英)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했다. 교회재건과 관련하여 감리교도 양파로 분열된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강력한 요구와 교계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양측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무조건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49년 4월 30일 서울 정동감리교회에서 통합 연회와 통합총회를 구성하고 김유순(金裕淳) 목사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제9대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한국전쟁 중 서울에서 공산군에 납치되어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분열되었던 감리교의 통합을 민경배는 ‘해방의 감격에 버금가는 감동’이라고 했다.

일제에 의해 해산됐던 성결교회도 재건을 서둘렀다. 성결교의 경우 43년 5월 24일 남녀 교역자가 검거되고 9월에는 성결교회의 공예배가 강제로 중지됐다. 또 그해 12월 29일에는 전 교회가 해산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해방과 함께 다시 교회문을 열고 교단 조직을 정비하게 된다. 45년 11월 9일 서울에서 재건 총회를 개최하고 의장에 천세광(千世光), 총회장에 박현명(朴炫明) 목사를 추대했다. 서울신학교를 개교하고 이건(李健) 목사를 교장으로 선임했다. 폐간됐던 활천(活泉)지도 복간됐다. 49년 4월 18일에는 이전의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고 불리던 교단 명칭도 ‘기독교대한 성결교회’로 변경했다.

‘동아기독교’라고 불리던 침례교도 해방과 함께 교단 조직을 정비하고 재건하게 된다. 침례교도 일제에 의해 43년 해산된 바 있으나 해방 이후 노재천(盧在天) 박기양(朴箕陽) 백남조(白南祚) 신성균(申性均) 이종덕(李鍾德) 등에 의해 재건이 시도된다. 침례교 일각에서도 일제시대의 교단 조직의 존속을 거론한 바 있으나 46년 2월 충청남도 부여에서 교단재건회의를 개최하고 침례교로의 독자적인 조직을 재건하기로 결의했다. 그해 9월경에는 예천 공주 강경 등지의 교회가 재건됐다. 당시 침례교 대회인 ‘대화회’(大和會)가 경북 예천에서 개최됐다.

일제하 간도지역에서 활동했던 한기춘 목사가 이전부터 미국 침례교본부와 관련을 맺고 있던 우태호 목사와 함께 미국남침례교 본부와의 제휴안을 제시했다. 대화회에서는 이 안을 채택했다. 이때부터 침례교는 미국 남침례교의 후원과 협조를 얻게 되었고 연합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이때 모인 대화회에서는 몇 가지 제도의 혁신을 단행했다. 감독제(監牧)를 회중제(會衆制)로 전환하고 교직자에 대한 명칭도 다른 교파와 동일하게 수정키로 하여 ‘안사’를 ‘목사’로, ‘감로’를 ‘장로’로 개칭했다. 교회정치제도를 회중제로 전환함에 따라 교역자 문제도 종래의 파송제를 청빙제로 변경하였다. ‘대화회’도 ‘총회’로 변경되었다. 동아기독교라고 불리던 교회 명칭을 침례교로 변경한 것은 49년이었다.

구세군도 재건의 길을 갔다. 구세군은 1908년부터 영국과 호주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활동했다. 그러다가 40년 일제에 의해 조선구세단(朝鮮救世團)으로 개칭됐다. 일본인이 단장으로 취임한 이래 대부분의 교회가 폐쇄된 상태에 있었다. 해방과 동시에 구세군 재건 운동이 시작돼 45년 11월 9일 서울에서 총회를 개최, ‘구세교회’라는 이름으로 재건하고 교회헌법을 제정했다. 46년 10월에는 영국 국제 본영(本營) 대표단이 방한함에 따라 교회명칭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교단 명칭을 ‘구세군’(救世軍)으로 환원했다. 사관학교는 47년 가을에 재건되는 등 해방과 함께 교회 혹은 교단이 재조직된 것이다.

(고신대·역사신학)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신청하기

국내외 교계소식, 영성과 재미가 녹아 있는 영상에 칼럼까지 미션라이프에서 엄선한 콘텐츠를 전해드립니다.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