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내 영혼의 책갈피] (1) GOD 기사의 사진

GOD (A W 토저·이용복 옮김·규장)

이윽고 우리는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이르렀다. 반가운 것은, 그러거나 말거나 책은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 같은 자에게는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예나 이제나 책 가난에 허덕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읽어도 읽어도 허기지는 그 갈망과 갈증의 정체는 무엇일까. 난로 위의 주전자 물이 푹푹 끓는 헌책방 낡은 의자에 파묻혀 읽고 또 읽어대던 열다섯 살 무렵의 기억은 탐닉으로 바뀐 지 오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 내 앞으로 지나갔던 책들은 무엇이었고 다가올 책들은 무엇일까. 내 생애의 책들은 어떤 의미와 눈짓을 던지고 흘러갔으며 또 그렇게 다가올 책들은 무엇일까. 문득 내 낡은 서가의 풍경을 바라본다. 사계절의 풍경처럼 책 세상의 풍경도 바뀌고 변했음을 깨닫는다. 문학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예술로, 다시 문학으로, 다시 철학으로 예술로 건축으로 여행으로…. 그러다가 한 책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님’. 그 이름이 붙은 책으로부터는 줄줄이 영적인 그 어떤 이름을 달고 있다.

귀밑머리 희끗해지도록 유난히 육적인 삶의 테두리만을 맴돌았던 내가 이제는 영혼의 목마름에 절실하다는 것일까. 영적인 책읽기를 통해 나의 육성(肉性)과 죄성(罪性)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정화되기를 바란다는 방증일까. 어쨌거나 비밀의 커튼 한 자락을 걷고 전혀 다른 세상을 엿보는 것과 같은 경외와 설렘을 가지고 나는 이제 새로운 책읽기를 시작하고 있다.

A W 토저의 ‘GOD’ 하나님은 누구신가. 대체 누구신가. 내가 읽은 영적인 책의 모든 출발은 이 물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누구시길래 너와 나의 하나님은 이렇게도 다른 것인가. 그분에 대한 오해와 이해 사이의 거리는 왜 이다지도 아득한가. 그리고 문명과 종교와 세대에 따라 벌어진 폭은 왜 이토록 메워지지 못하는 것인가. 나는 하나님의 어느 부분을 보며 그대는 또 하나님의 어느 부분을 보는 것일까. 아니 한 부분이나마 제대로 보고 있기는 하는 것일까. 이 책은 왜 수많은 ‘하나님’ 책 중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내 서가에 견고하게 꽂혀 있는 것일까.

이 모든 물음의 답을 찾기 전에 먼저 저자인 A W 토저(1897∼1963)에 대한 신뢰감을 고백해야 될 것 같다. 내가 그의 책에 신뢰감을 갖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쉽다. 쉽되 경박하지 않다. 어렵고 심오한 내용을 쉽게 쓸 수 있다는 것만큼 미덕도 없다. 둘째는 상상력을 절제하고 있다. 수험용 참고서처럼 무덤덤할 뿐더러 상상력의 비약이나 문장의 현란한 수사를 남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직도 미문(美文)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서는 이것이 일종의 용기로까지 보인다.

‘GOD’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에 대해 말할 뿐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기의 입장이나 견해는 말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종종 소위 뛰어난 저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예수에 대한, 구원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에 끌려다니느라 정작 원줄기를 놓쳐버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자는 하나님에 대해 실제 곁에서 뵈어온 자기 육신의 부친처럼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 직업은 무엇이며 키는 몇 ㎝이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라는 식으로.

놀라운 것은 그가 성경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초상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호세아서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며 애타게 권유하고 있거니와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되는 까닭이리라. 사실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편견 혹은 몰이해로 얼마나 많은 인류사의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이어졌는지 모른다.

아론의 금송아지와 바벨탑으로부터 시작하여 종교 재판과 마녀사냥과 십자군전쟁과 9·11테러와 그 테러에 대한 보복의 악순환에 이르기까지, 어찌 보면 인류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고 무너지기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모든 행위의 개인적 혼은 집단적 귀책을 결국 제각각의 하나님과 그 정의에 두려는 성향이 있다.

저자는 이점을 지적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믿음과 구원의 기초라고 역설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울로 보듯 희미한 상태에서 벗어나 장차 그분의 나라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기쁨으로 뵐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천국을 만드시고 그 아들의 희생을 통해 구원을 이루신 그분을 정작 우리가 장차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 몰라보거나 오해한다면 그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 한없이 크고 선하시며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분,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스스로 존재하실 뿐 아니라 초월적이며 무엇보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 그 하나님을 알기에 이만한 학습서도 만나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다.

(서울대 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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