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이몽룡 증후군 기사의 사진

“대선 후보마다 변 사또의 학정에서 해방시키고 官庫 털어 곡식 나눠주겠다니…”

보름쯤 몽골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대학생 봉사단을 따라 사막에 나무를 심기 위해서다. 이것저것 챙겨보다가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가 우리나라를 영국 독일 뉴질랜드와 함께 4대 조림성공 국가로 발표한 바가 있다고 한다. 유엔이 한국과 이스라엘을 20세기 녹화 성공 사례로 꼽는다고도 하고.

어렸을 적 민둥산을 떠올리면 오늘의 산은 기적이다. 시골에서 성장기를 보낸 50∼60년대를 통해 의식 속에 각인됐던 이미지가 ‘헐벗은 산과 가난한 나라’였다. 천형 같은 것이라 여겨졌던 두 가지가 반세기 만에 꿈같이 치유됐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말쑥한 얼굴을 하게 된 것이다.

아직은 겉모양 뿐일지도 몰라도 이만큼이라도, 우리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것을 이뤄냈다. 우리가 남에게 조림을 가르치고, 경제발전 전략을 전수하고, 우리가 받았던 이상으로 남에게 베풀려고 지구적 범위에서 경제적 지원과 봉사를 하는 날이 오다니!

그런데 정치인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우리 사회에는 대한민국이 이대로 갈 수는 없다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이 만연해 있습니다.” “저는 이 절박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퇴로를 끊고 배수진을 친 장수의 심정으로 힘든 여정에 오릅니다.” 특정인의 말을 인용해서 미안하지만, 사람이 아니라 그 언설의 배경에 있는 정치인들의 인식을 말하자는 것이다.

국가 현실에 대해 유난히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다. 특히 정치리더 가운데 이런 유형의 인사가 많아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지옥도로 그린다. 그래야 영웅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몽룡 증후군’이라 할 수도 있다. 거지 차림으로 끼어든 악질 사또 변학도의 생일잔치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지만 단 한 마디의 고함소리, “암행어사 출두야!”로 상황은 일거에 뒤집힌다. 변 사또는 오랏줄에 묶여 동헌 마당에 끌려나오고 죽음을 기다리던 춘향이는 출세한 애인과 판타스틱한 재회를 한다. “여러분, 제가 이몽룡이 되겠습니다. 독재자 변학도에게 학대당하고 있는 여러분을 해방시키고, 관고(官庫)를 헐어 변 사또가 착취해서 쌓아둔 곡식을 여러분께 모두 나눠드리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곤란한 점이 우리에 대한 외부의 긍정적 평가다. 자신의 호민관 얼개 구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려한 외양만 보고, 썩어문드러진 속은 못 본 채 내린 평가”라고 반박한다. 그걸 입증하기 위해 우리의 온갖 부정적 측면들을 취모멱자(吹毛覓疵)한다.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세상에서 우리만큼 슬프고 힘겨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달리 없다.

정치인만이 아니다. 지식인 가운데 일부도 현실 비틀기 조롱하기 비관하기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좋은 머리, 높은 학식을 가지고 조롱의 언어, 저주의 언어, 모욕주기의 언어들을 양산하고 전파하기에 영일이 없다.

편하기로는 이게 으뜸이다. 새로운 것을 창안하거나 창조하는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다. 이미 있는 것, 남이 이뤄 둔 것에 시비만 걸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현실은 모순투성이로 보이게 마련이다. 만족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불만의 대중은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비틀기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박수를 보내는데 이들은 자신의 처지가 ‘재주 부리는 원숭이나 곰’인지도 모르고 같은 행태를 되풀이한다.

뭔가 절박하게 원하는 게 없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원하는 바가 없다는 것, 그러니까 need가 없는 개인이나 사회는 발전의 동기와 동력을 갖기 어렵다. 정치인, 지식인들도 대중에게 제시할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지 못할 경우 손쉽게 선택하는 것이 헐뜯기다. 앞서 만들어진 구조나 가치의 어두운 측면을 강조하면서 이를 헐어내는 것이 영웅적 행동이나 되는 듯이 자기를 포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다는 약속이 ‘관고 헐어 인심쓰기’다. 앞으로 전개될 대선 경쟁, 참으로 가관이겠다.

이진곤 논설고문 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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