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내 영혼의 책갈피] (3) 창 기사의 사진

창 (루이스 더블, 정낙천 옮김, kinema in books)

1989년 11월 23일 새벽 나는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대학병원으로 실려 갔다. 길고 험한 수술이 이어졌다. 부분마취가 풀리면서 생사를 찢는 아픔이 지나갔다.

내 왼쪽 다리의 길게 절개한 부분으로 작은 바늘이 뚫고 지나갈 때마다 그 고통은 엄청난 양으로 육신 전체로 퍼져나갔다. 문득 이 고통을 참다가 어금니가 바스러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가 떠올랐다. 피와 땀이 범벅된 그 얼굴이 다가왔다. “아프냐, 나는 너의 죄로 인해 더 아프다.” 그 얼굴은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그분의 사지에 쾅쾅 박혀지던 큰 못과 옆구리의 창도 생각났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이 관념이 아닌 현실이라는 데에 비로소 생각이 머물렀다. 그렇다. 십자가의 고통은 관념이 아닌 처절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나는 육신의 고통을 당하면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육체 고통이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경험한 육체의 고통이라는 것은 치과에서, 그것도 마취상태에서 경험한 것 정도가 전부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도 지식이나 사건의 기록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었고 관념으로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을 축소시키거나 관념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마저 무너뜨릴 만한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을 비로소 병상에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분이 속죄의 제물로서 당한 육체의 고통은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을 격하시키거나 관념화시킬 때 우리는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선행을 비롯한 무언가를 그 죽음 위에 보태야만 될 것 같은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역사와 함께 퇴색하거나 관념화될 수 없는 여전하고 생생한 현실이어야 하는 것이다.

‘창’은 갈보리에서 예수의 옆구리를 자신의 창으로 찔러 절명시킨 로마 병사 카시우스 롱기누스에 대한 문학적 기록이다.

젊고 매력적인 한 로마 청년이 십자가 형틀에 묶인 나사렛 사람 예수를 어떻게 자신의 창으로 찔렀으며 그 살상 전후에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보고서 형식의 문학작품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처형된 후 군대에서 백부장이 되기까지 로마 군인으로 승승장구해 전도유망하던 주인공 롱기누스는 자기가 죽인 그 사람이 나중에 그리스도였음을 알고 깊은 충격에 빠진다.

어느 날 그는 야위고 수척한 얼굴로 사막 속으로 걸어간다. 사막에서의 처절한 고독과 참회의 시간이 지난 후 전역신고서를 쓰고 베드로를 만난다. 장래가 보장된 로마 군인의 신분에서 갈릴리 어부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이후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해 현장에 있었을 뿐 아니라 본인이 바로 자신의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를 쏟게 함으로써 예수를 죽게 한 장본인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고백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그의 창이 제시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이 병사의 증언을 통해 날이 갈수록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이 만천하에 보다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로마 병사의 불의한 무기인 창이 의로운 병기의 하나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찌른 것은 롱기누스의 창만은 아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날마다 죄의 창으로 무수히 십자가의 그분을 다시 찔렀던 것이다. 이제 병사의 창은 그 번쩍이는 끝이 나와 그리고 당신을 향하고 있다.

창에 찔려 그리스도와 같은 육체적 죽임을 당하지 않고서는, 즉 육성과 죄성이 그 창에 의해 찔려 죽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문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김병종(서울대 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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