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내 영혼의 책갈피] (6) 침묵 기사의 사진

침묵 (엔도 슈사쿠, 공문혜 옮김, 홍성사)

얼마 전 교회에서 얼굴이 유난히 새까맣게 탄 중년 부부를 만났다. ‘휴가 한 번 요란하게 다녀왔군’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부부 선교사란다. 각각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그곳으로 간 지 몇 년 만에 모국을 방문한 것이었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침묵’은 도쿠가와 시대에 일본에 선교사로 간 예수회 소속 한 신부의 배교(背敎)사건을 다큐 형식으로 다룬 작품이다. 당시 선교사들과 신도들을 운젠(雲山)의 지옥의 열탕으로 데려가 신앙을 부정할 때까지 펄펄 끓는 물로 고문하는 것을 비롯, 도요토미 시대부터 이어진 고문과 박해는 악명 높은 것이었다. 어느 한 지역에서는 한꺼번에 무려 스물여섯 명이 불에 타 처형되기도 하였다.

그런 박해 속에서도 오랜 세월을 꿋꿋이 버티며 희망의 등불이 되어온 페레이라가 그리스도의 성화를 밟고 배교했다는 사실은 그를 파견한 포르투갈 예수회에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책은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불굴의 신앙으로 뭉쳐진 신앙영웅 페레이라가 그 먼 곳까지 가서 어떻게 자랑스러운 순교자가 아닌 치욕스러운 배교자의 길을 걸어 목숨을 부지하게 되는가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끔찍한 고문과 취조 끝에 죽어가는 선교사들과 신도들을 지켜보면서 페레이라가 마음속으로 부르짖은 것은 오직 한 가지 “주여 어디에 계시나이까”였다. “이 악을 보시지 않습니까. 왜 침묵하십니까”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핏빛 절규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침묵 앞에서 그는 절망하고 좌절한다. “내가 고통 받을 때에 주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질문은 거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생에 몇 번씩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테레사 수녀 같은 이도 신앙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던졌고 절망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던가.

어쩌면 신앙이 좋다는 사람일수록 이런 질문의 벽 앞에 자주 서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페레이라 역시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오랜 시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고문이나 뜨거운 지옥탕 물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침묵이었을 것이다.

영혼의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난 끝에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성화 위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 순간 그토록 고대하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라,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 부드러운 눈빛을 통해 비로소 네가 괴로워할 때 나도 네 곁에서 그 괴로움을 함께 당했노라는, 최후까지 너와 함께하였노라는 사실을 읽어낸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페레이라가 그리스도의 얼굴 위에 자신의 더러운 발을 올려놓는 순간에 나는 헨델의 메시아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연약한 인간이 흐느껴 울며 쓰러지는 그 실패 속에 바로 그리스도의 승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역설이야말로 사랑하는 자의 고통 앞에 그분이 결코 침묵하시지 않는 징표이기도 했던 것이다.

스물 몇 살 때 처음 읽은 ‘침묵’은 배교자 페레이라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먼저 다가왔다. 마흔 무렵에 다시 읽었을 때는 실망이 연민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그의 얼굴에 내 모습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페레이라는 단 한 번 그리스도의 얼굴을 밟고 지나갔지만 나는 무수히 십자가의 그분을 다시 찌르고 그 얼굴에 수도 없이 어지럽게 발자국을 남겼다는 자책으로 다가왔다.

‘침묵’, 앞으로 더 세월이 흘러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또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인가.

(서울대 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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