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내 영혼의 책갈피] (7) 기도 기사의 사진

기도 (필립 얀시, 최종훈 옮김. 청람출판)

한 정신과 의사 친구의 권유로 명상에 관한 책을 한 권 샀다. 책의 99%는 명상이 얼마나 정신과 몸의 건강에 좋은가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명상으로 효과를 본 많은 사례들도 나와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다가와도 어떻게 명상하는가에 대한 설명 같은 것은 단 한 줄도 없었다. 심지어 “무념무상의 상태로 단전에 힘을 주어…”와 같은 그럴듯한 구절하나 없었던 것이다. 그냥 명상이 좋다, 그러니 당신도 해 보라는 식이었다.

책을 덮으면서 문득 ‘기도’에 관한 수많은 책들 또한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는 좋다, 영적 호흡이다, 당신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그러니 기도하라….

철들 무렵부터 나는 기도에 관한 백전노장들의 간증에 둘러싸여 자라 왔다. 어머니와 형 그리고 누나들의 기도에 관한 무용담을 듣노라면 난 금방 풀이 죽곤 했다.

오직 나 혼자만 벽 앞에 서 있는 듯 막막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내 기도는 맞는 것일까, 아니 나의 웅얼거림은 기도이기는 한 것일까.

필립 얀시의 ‘기도’. 나는 처음에 좀 뜨악했다. 그 제목은 어쩐지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 것이 사실이었다. 기도에 관한 명저를 쏟아내었던 O 할레스비나 E M 바운즈였다면 몰라도 필립 얀시에게 기도는 아무래도 치렁치렁한 검은 사제복을 입은 것처럼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처럼 그간 그의 책들은 내게 보다 산뜻하고 포퓰러한 그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웬만하면 기도라는 주제와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저자 자신이 제대로 기도하지 못한 죄책감과 열등감에 시달려왔으며 응답받은 기도에 기뻐하기보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에 집착했던 것이 실상이라는 얘기도 했다.

그런 고백 후에 놀랍게도 저자는 전통적이며 무겁고 장중한 주제인 ‘기도’에 대해 자기 스타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아니다. 가벼움이 아닌 진솔함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기도의 왕초보임을 고백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왕초보들끼리 함께 탐험을 시작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한다. 비로소 이 시대 최고의 복음주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알려진 저자가 기도의 왕초보라면 매번 기도의 절벽 앞에 선 듯 막막했던 나 또한 위로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글쟁이 기질을 발동시켜 전문가가 아닌 순례자의 마음으로 함께 기도의 산을 넘고 기도의 광야를 건너보자고 권유한다. 하나님의 영역에다 기도를 통해 모든 짐을 부려놓고 어찌되는지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자는 식이다.

기도에 관한 이런 접근의 태도에 호기심과 호감이 동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광속으로 빨리 돌아가고 있어 진득이 무릎 꿇지 못하게 한다. 뭔가 어깨를 툭 쳐서 돌아보면 그것은 저만큼 미래가 되어 멀어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기도라는 불확실성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묻고 전문 카운슬러의 문을 노크한다. 신앙 좋은 사람이라 해도 자녀들이 아플 때 무릎 꿇는 대신 앰뷸런스를 부른다.

저자의 언급처럼 등 따습고 배부르게 된 현실 역시 기도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이 시대는 기도에 관한 회의로 가득 찬 공기를 숨쉬며 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 기도하자고 권유한다. 다만 그것이 의무 아닌 기쁨이자 특권이 되기 위해서는 운동으로 근육을 키우듯 약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그 훈련의 첫 번째는 뜻밖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저 가만히 있어 그분이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시 46:10)이야말로 효과 있는 기도의 첫 출발이라는 것이다. 말 할 것도 없이 그 태도야말로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하나님 그분이심을 인정하는 첫 출발인 것이다.

(서울대 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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