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2012년 가을, 백석과 윤동주 기사의 사진

“사회가 시끄러운 때 민족시인의 100주년을 그냥 넘기는 문화적 가난이 슬프다”

당대에 이름을 얻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진가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 현대시사에서는 대표적으로 백석(1912∼96)과 윤동주(1917∼45) 시인이 그렇다. 사라진 이름을 불러내는 ‘세월의 분별력’은 신비롭다. 백년의 시사에서 다섯 손가락이나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한 사람이로되, 이름 없이 묻혀져갈 때 세월은 침묵을 거두고 개입한다.

백석 시인은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그를 기리는 이런저런 행사가 있긴 하지만 거의 모르고 지나간다. 문화적 중심이 얕은 사회의 특징이다. 지난 1987년 월북문인 해금조치 이후 일반에 알려진 백석은 그동안 우리가 망실해 왔던 고유문화에 대한 자각과 북방(北方)정서에 대한 그리움으로 단숨에 한국현대시 10대 시인의 범주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 랭킹은 점점 올라가고 있다.

백석은 지금처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진영갈등이 극심해지는 때에, 서민과 중소기업을 위한 경제의 동력이 식어가는 때에, 전국이 성범죄의 도가니처럼 시끄러운 때에 이런 문제들을 때려서 다듬어줄 만한 시어를 가진 시인이다. 가난한 시인이 나라를 잃고 만주벌판을 떠돌며 얻은 값진 시편들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우리가 돌아봐야 할 가치로 화인(火印) 찍지 못하고 그냥 넘기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가난이 안타까운 것이다.

신경림 같은 시인은 청년기에 통째로 외워버렸다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같은 시가 보여주는 춥고 외로우면서도 고고한 세계,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고 고백하는 ‘흰 바람벽이 있어’ 같은 시는 감히 말하건대 한국시의 극한이다.

이런 시를 읽을 때에는 어김없이 또 한 사람의 시인이 겹쳐온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시인 윤동주. 그의 ‘서시(序詩)’를 소리쳐 읽기에 우리가 너무 낡아 부끄럽다면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별 헤는 밤’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랜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부분)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이라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이들은 더구나 현 정부가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남북관계의 빙하시대에 세월을 넘어 간도와 만주벌판과 여진(女眞)의 광활을 두만강 살얼음보다도 더 명징하게 펼쳐내는 북관(北關)의 증인들이다. 한 사람은 분단 당시 북한 공산 치하에 남아 순수시를 남기지 못함으로써 남과 북을 아우르는 세계적 시인이 되는 기회를 잡지 못했고, 또 한 사람은 일본 유학 중에 독립운동 혐의로 수감돼 스물여덟에 이국의 형무소에서 숨졌다.

대선 후보 검증문제를 놓고 나라가 들끓어 오르기 직전의 이 시기에 우물 속에 비친 제 비루한 모습을 보고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소년의 연민 혹은 자기 점검(윤동주 ‘자화상’)은 얼마나 소중한가. 신 살구를 잘도 먹더니 눈 오는 아침에 첫 아들을 낳는 나이 어린 아내(백석 ‘적경(寂境)’)는 얼마나 뽀송뽀송한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지 않고 새길 줄 아는 사회는 선한 것들을 많이 간직할 수 있다.

편집인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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