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권력, 그 치명적 매력 기사의 사진

“힘의 오·남용 방지는 국민 책임… 聖賢이나 마술사가 아닌 公僕을 뽑아야”

“자유여, 너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졌던가.” 마담 롤랑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했다는 말이다. 한때는 ‘지롱드파의 여왕’으로 불릴 만큼 혁명기 프랑스 정계를 주름잡았던 여인이었지만 루이16세 처형을 둘러싸고 자코뱅과 반목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롤랑 부인은 혁명의 와중에서 자유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숱한 범죄적 행위를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혁명파의 일원으로 자부했던 그 자신이 바로 혁명의 논리와 혁명파의 고발에 의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그 이율배반적 처지에 놓인 자신, 그리고 신봉했던 가치 ‘자유’에 대해 대단히 시니컬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범죄행위를 유발했고, 또 지금까지도 그 속성에 변함이 없는 것은 기실 ‘자유’가 아니라 ‘권력’이다. 롤랑 부인 자신이 남편 장 마리 롤랑을 지롱드 내각의 내무장관으로 만들기 위해 수완을 발휘했던 권력지향형 인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권력이 자신과 남편, 그리고 수많은 반혁명파·혁명파를 뒤섞어 죽음으로 내몰았다. ‘권력의 잔혹사’는 종언을 고했는가? 지금 세계사적으로도 가장 잔혹했던 세기 중의 하나로 기록될 20세기를 넘어서면서 인류는 비로소 평화와 안전과 안도의 새 시대를 맞을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권력의 짐승 같은 포효는 멈출 줄을 모르고 있다. 리비아에서 이미 있었고, 시리아에서는 지금도 계속되는 자국민 대량 살상극의 중심에 있는 게 바로 ‘권력’이다.

이제 대선 본선 구도가 뚜렷해진 만큼 선거전도 본격화하게 됐다. 임기를 정해두고 정례적 선거를 통해서 통치자를 교체하는 민주제도는 권력의 야수성, 권력에 대한 동물적 집착을 예방하는 백신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간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상당히 진전된 민주정치 실천 국가가 됐다. 이 점은 자부해도 좋을 정도다.

그러나 ‘권력’이 가진 치명적 매력에서 인간이 해방된 것은 아니다. 지금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나선 사람들 또한 권력의 매력에 이끌렸을 것이다. 당사자만이 아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조력자들도 심리적 동기는 하나다. 권력을 나눠 행사하거나 최소한 그 위세라도 부려보고 싶기 때문일 터이다.

그거야 탓할 바 아니지만, 권력의 속성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말아야 한다. 입으로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도 예외 없이 ‘권력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대통령이 되면 국민이 원하는 것 모두 이뤄주겠다는 공약을 내놓는다. 예산이 얼마나 들건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라는 투다. 국민의 돈을 쓸 것이면서 국민에게 생색을 내고 힘을 과시한다. 당사자도 그렇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거드름은 목불인견이다.

대통령 당선이 성현 인증인 것처럼 착각하는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도 있다. 갑자기 스승이 되어 국민을 가르치려들고, 자신의 생각과 행위에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선악을 판단하려는 행태를 보이게 되는 것도 권력의 이면 가운데 하나다. 대통령은 국민의 어버이도, 스승도, 판관도 아니다. 다만 공복일 뿐이다.

사실은 후보나 주변의 권력상인들보다 더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측은 유권자들이다. 권력은 국민에 의해 적절히 제어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해내는 초능력자이기를 요구한다. 독재자는 용납하지 못한다면서도 독재적 대통령이 되라고 등 떠미는 격이다. 국민과 같은, 혹은 약간 위쪽의 눈높이로 국정을 이끌어갈 서민적 대통령을 원한다면서도 성현이거나 영웅을 주문한다.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후보들, 정당들 간의 대결이 얼마나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버릴지 지레 겁이 나서 하는 말이다. 얼마나 거창한 공약들이 국민의 도덕성을 마비시켜 놓을지 두려워서 하는 걱정이다.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역대 선거와 그 결과로 등장했던 정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불안한 예감과 맞아떨어졌으니 어쩌겠는가.

이진곤 논설고문·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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