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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고승욱] 특검과 ‘나가리’ 발언

[여의춘추-고승욱] 특검과 ‘나가리’ 발언 기사의 사진

“검찰 수뇌부의 정치적 판단에 맞춰 수사팀이 법리를 찾는 방식은 버려야 한다”

17년 전인 1995년 이야기다. 햇병아리 기자 시절 검찰청사에서 취재할 때였다.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이 4000억원”이라는 서석재 전 총무처장관의 발언이 나왔다. 93년 동화은행 사건으로 구속됐던 정치권 인사들이 광복절을 맞아 대거 사면복권된 직후였다. 겨우 진정됐던 정관계 비자금 의혹이 다시 불거졌고 여론이 들끓었다. 마지못해 수사에 착수했던 검찰은 “서 전 장관 발언은 소문이 부풀려진 해프닝”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때 수사 결과를 발표한 검사가 “이런 것을 보고 나가리라고 하지요”라고 말을 맺었다. 고스톱에서 무효가 된 판에 비유한 것이다. 기자실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유명한 ‘나가리 발언’이다. 검찰 수사는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은 그렇지 않았다.

그해 10월 박계동 당시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을 하며 전표 한 장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차명으로 개설한 계좌의 잔액조회표였다. 다음날 검찰총장은 수사 착수를 지시했고, 대검 중수부가 나섰다. 한 달 뒤 노 전 대통령이 수뢰 혐의로 구속됐다. 나가리가 아니라 흔들고 박을 씌운 결과가 됐다.

시간이 지나자 이 사건을 전후해 검찰에서 있었던 일이 대부분 드러났다. 검찰은 동화은행 사건 수사 당시 은행장의 계좌를 추적하면서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1000억원을 예치했던 사실을 알아냈다. 담당 검사는 동화은행 외에 다른 은행으로 수사를 확대하려고 했으나 수뇌부의 압력으로 중단됐다고 폭로했다. 적당한 선에서 수사를 끊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검찰이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니었다. 다음해인 94년 중수부는 동화은행 수사자료를 토대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본격적으로 내사해 4000억원 규모의 6공 비자금 실체를 거의 대부분 파악했다.

서 전 장관의 발언은 검찰의 내사 결과를 토대로 이뤄진 것이었다. ‘나가리’를 외칠 때 검찰은 이미 전직 대통령이 주인공인 권력형 비리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한 시민단체가 당시 검찰총장과 청와대 민정수석을 직무유기 및 범인은닉 혐의로 고발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20년 가까이 된 이야기를 길게 꺼낸 것은 검찰의 이런 일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의혹 관련자를 기소하지 않은 이유가 대통령 일가가 수혜자로 규정되는 게 부담이 됐기 때문이라는 발언이 최근 검찰에서 나왔다. 검찰이 이 대통령의 아들 시형씨를 비롯해 관련자 7명 모두를 불기소 처분할 때 쏟아졌던 봐주기 의혹이 사실이었음을 방증할 수도 있는 말이다. 특검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청와대가 보였던 애매한 태도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실 검찰발 폭탄발언은 단순한 실수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검찰총장을 비롯한 수뇌부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판단하고 처벌 수위를 결정하면 수사팀이 법리를 찾아내는 식으로 사건이 처리된다. 일반인의 법감정과 동떨어진 결과가 나오고 이것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은 “12·12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지만 역사 평가는 후대에 맡겨야 한다”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발언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집권여당 사무총장이 검찰총장을 향해 “총장이면 같은 총장이냐”고 했다던 우스개가 돌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넘기기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찜찜함이 남는다.

그제 이광범 특검이 이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이 특검이 추천한 특검보 후보자가 임명되면 준비기간을 거쳐 수사가 시작된다. 사안이 단순한 만큼 결과를 예측하기도 어렵지 않다. 특검이 활동하는 동안 검찰은 매우 불편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대통령 일가’ 발언은 법리를 충분히 검토했다는 나름대로의 항변이다. 정치적으로 판단한 게 아니라는 주장도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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