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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이명희] 재벌개혁의 허와 실

[여의춘추-이명희] 재벌개혁의 허와 실 기사의 사진

“대기업 발목 잡는 경제민주화는 곤란… 공정룰 만들고 반칙 처벌 강화하면 될 것”

“이제는 20대 재벌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앙심 먹고 철수하려 한다. 그 1500배에 달하는 3만여개의 중소기업이 뛰놀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 대기업에만 금융이다 세제다 해서 지원하다 보니 여백이 없다.”(남덕우·사공일·강경식 등이 쓴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3저(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호황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제 과외교사를 했던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한 말이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 주도 하에 급성장한 대기업들의 독과점과 불공정거래 폐해가 심각했다. 대통령으로부터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전폭적 신임을 받은 김 전 수석은 대기업들을 위한 금융우대 제도와 세제혜택 철폐를 주장했고, 대기업 독과점을 막기 위한 공정거래 제도를 만들었다. 정보통신산업과 중소기업 성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 것도 이때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똑같은 폐단을 없애자고 재벌개혁 논의가 한창이다. 역대 선거 때마다 중소기업과 서민 표를 얻기 위해 경제파탄과 양극화의 책임은 대기업에 돌려지곤 했지만 이번엔 강도가 다르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안철수 무소속 후보는 속도와 정도 차이가 있지만 순환출자 금지, 금융·산업자본 분리,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엄단, 대기업 총수 사면 금지 등 재벌개혁의 골격은 비슷하다.

대기업들은 폭풍전야를 맞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힘들 것은 분명해서다. 과거에는 대권주자에게 정치자금을 대주며 ‘보험’을 들어놨기 때문에 안심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여차하면 3년 내 기존 순환출자 해소(문 후보 측 공약)를 위해 수십조원을 쏟아부어야 하고, 계열분리명령제(안 후보 측 공약)에 따라 알토란 같은 계열사를 뺏길 판이다. 세계시장에서의 경쟁과 경기침체 늪을 헤쳐가기도 벅찬데 왜 남의 회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느냐며 기업들은 불만이지만 매를 번 것도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를 폐지해줬더니 동네 빵집, 순대, 청국장 사업까지 진출해 중소기업들을 쫓아냈고, 문어발처럼 늘린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면서 편법적인 부의 상속과 증식에만 열을 올렸다. 30대 그룹 순이익의 55%가 삼성과 현대·기아차 2개 그룹에서 나올 정도로 경제력 집중이 심각해졌다. 스타 기업 2∼3곳에 의존해선 경제가 지속 성장할 수 없다. 중소기업이 성장하면서 더 많은 중견기업들이 허리를 받쳐주는 항아리형 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그렇다고 잘하는 대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경제민주화가 돼선 곤란하다. 특권이 통하지 않도록 공정경쟁의 틀을 만들어주고 반칙이나 위법 행위가 있으면 처벌을 강화하면 된다. 재벌해체나 대기업에 대한 분풀이가 시급한 건 아니다. 당장 국민들이 원하는 건 2%대까지 떨어진 성장률을 어떻게 끌어올려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사교육비와 물가 부담을 줄여 내 지갑을 두둑하게 해줄 것인가다.

박 후보가 어제 과학기술과 정보기술(IT) 기반의 일자리 창출 전략인 창조경제론을 제시했다. 문 후보는 일자리를 통해 성장을 이뤄내는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고, 안 후보도 중소·중견기업 육성을 담은 혁신경제 구상을 밝혔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5년간 후퇴시켜 놓은 IT·과학기술 정책과 중소기업 육성 정책을 되살리겠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일부는 뜬구름 잡기식 말 성찬에 그치지 않을까 싶다.

1980년 미국 대선에 출마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는 “경기가 회복되려면 지미 카터 현 대통령이 일자리를 잃어야 한다”고 풍자했다. 대한민국의 5년을 이끌어가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세 후보가 일자리를 잃어야 경기회복이 될 거라는 말이 요즘 ‘동네북 신세’인 대기업들 입에서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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