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 기사의 사진

“늘 보는 것인데도 그것이 그림으로 그려지면 비로소 사람들은 관심을 가진다.” 파스칼의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언제나 보는 주변의 것들을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대신 그것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면 그제야 주목을 하곤 한다. 프레임 변화 효과라고 할까.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디자인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내 몸 위에, 책상 위에, 집 안에, 거리에, 상점의 진열대 위에. 디자인은 언제나 그곳에 그렇게 있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최근 디자인을 다시 주목하고 있는가. 여기에는 어떤 프레임이 작용하고 있는가.

디자인이 산동네에서 범죄 예방을 이야기하고, 역 앞에서 노숙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가진다. 이건 뭐지, 이런 것도 디자인인가, 아니 디자인이 이런 것도 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그런 것도 디자인이다. 아니 원래 그런 것이 디자인이다. 우리는 디자인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디자인을 너무 좁고 고정되게 이해해온 것이 아닐까.

우리가 주로 알고 있었던 디자인이란 어떤 것이었나. 그것은 대부분 상품과 관련된, 그것도 거의 외관을 꾸미는 것만 의미했다. 물론 근래에는 공공디자인이다, 도시디자인이다, 뭐다 하면서 디자인이 상품 소비의 사적 영역을 넘어 공공 영역으로까지 확산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은 여전히 외관과 관련을 맺어온 것이 사실이다. 소비재만이 아니라 도시디자인에서조차도.

디자이너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디자인은 단지 외관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자면 디자인은 표피가 아니라 심층과 관련된 그 무엇이라고. 물론 나는 이것이 자신의 작업을 좀 더 폼 나게 포장하기 위한 디자이너들의 상투적인 언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속으로 깊이가 없는 것이 문제일까. 아니 그 이전에 과연 디자인에서 겉과 속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한국 디자인에 불만족하는 것은 그것이 심층적 차원 이전에 표층적 차원에서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껍데기에 관한 그 무엇이라는 것은 일단 진실이다. 그러니까 제발 나에게 디자인은 단지 외관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 어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처럼 심층은 없다, 표층이 곧 심층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껍데기뿐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디자인에서 심층과 분리된 표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 껍데기만 아름답다면 그것은 껍데기도 아름답지 않다는 것. 디자인에서 박피술이란 불가능하다는 것. 원래 형태와 기능의 일치, 그것이 현대디자인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디자인이 범죄를 예방하고 노숙자들에게 질서의 따뜻함을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는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는가. 그것은 껍데기일까 속내일까. 분리할 수 없다. 디자인은 원래 그런 것이고 그랬어야 하는 것이니까.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디자인을 잘못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디자인을 잘못 해왔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을 그렇게 오도해왔고 오남용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 죄상을 여기에서 다 풀어놓을 수는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디자인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마치 이제까지 그것을 몰랐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 이유는 하나도 없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인데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반대로 디자인을 만능해결사 맥가이버인양 착각해서도 안 된다. 디자인은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범죄 예방 디자인도 좋지만 혹여 그것이 범죄의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해 눈을 감게 만드는 효과를 갖고 온다면 곤란하다. 디자인은 119가 아니다. 디자인은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보는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자 이제 디자인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믿음에 앞서 필요한 것은 앎입니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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