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걸기-한승주] ‘광해’에서 현실정치를 읽다 기사의 사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인턴사원의 메모에서부터 시작됐다. 2009년 말 CJ엔터테인먼트(이하 CJ) 대학생인턴기획단에 있던 한 학생이 아이디어를 냈다. ‘광해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독살의 위협을 느껴 대역을 썼다는 얘기가 있다. 천민 출신의 가짜가 왕 노릇을 하며 선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라는 요지의 짧은 글이었다. CJ는 그에게 소정의 원안료를 지급하고 아이디어를 채택했다. 한국영화 사상 일곱 번째로 ‘1000만 관객’ 왕좌에 앉은 영화의 출발이다.

당초 강우석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나 제작사 CJ와의 의견 충돌로 교체된 후 추창민 감독으로 결정됐다. 주연배우 이병헌이 캐스팅된 후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촬영하고 후반작업을 거쳐 9월 13일 세상에 나왔다. 대선 정국이라는 시점과 맞물렸다고 하지만, 감독이 중간에 바뀌지 않았으면 이미 1년 전쯤 나왔을 터. 영화에도 저마다의 운명이 있는 듯하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는 인상적인 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땅 열 마지기 가진 이에게 쌀 열 섬을 받고, 땅 한 마지기 가진 이에게 쌀 한 섬 받겠다는데 그게 차별이요?”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소중하오!”

천민 출신의 임금은 아무 거리낌 없이 직관적으로 말한다. 머리를 굴려 생각한 게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내 입장이 곧 백성의 입장이니 뻔히 질 싸움에 우리 군사를 파병하는 게 말이 안 되고, 번 만큼 내라는 게 상식에 맞는 것이다.

왕 노릇을 하는 광대 하선은 백성들이 공납을 채우느라 노비가 되고 기생이 되는 판에 지주들의 사소한 이익을 운운하는 신하들에게 대동법을 즉각 실시하라고 호통을 친다. 궁에서 나고 자란 왕이었다면 도승지 허균의 생각대로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정치적 계산을 했겠지만 저잣거리에서 나고 자란 가짜 왕은 달랐다.

17세기 광해군과 허균, 호패법과 대동법, 그리고 중립외교라는 실제 역사에 기초한 이 영화는 정작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닌 권력 다툼에 매몰된 정치, 그로 인해 고통 받고 소외당하는 백성의 삶이 400년 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가짜 임금이 제 이익 챙기기 바쁜 탐관오리들에게 “제발 적당히 좀 하시오”라고 소리치는 장면은 통쾌했다.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하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사월이(심은경)와 도부장(김인권)을 보며 진심만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도 느꼈다. 대통령 선거가 두 달도 남지 않은 지금, 국민들이 바라는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지도 분명히 알게 했다.

유력 야권 후보들이 이 영화를 관람한 후 호평을 내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광해…’를 보면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며 눈물을 쏟았다. 마지막 나루터 이별 장면에서 백성이 원하는 진짜 왕이었지만 궁궐을 떠나야 했던 하선의 모습이 노 전 대통령과 겹쳐 보였다는 것이다. 안철수 무소속 후보 역시 “약자를 대하는 지도자의 진정성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했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이 영화를 보고 정치가 무엇인지, 지도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생각한 이가 정치인들만은 아닐 것이다. 1000만명의 관객이 극장문을 나서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누구라고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한승주 문화생활부 차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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