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내 영혼의 책갈피] (17) 월든 기사의 사진

월든 (HD 소로우, 박현석 옮김. 동해출판)

“우리 집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산마루를 스쳐 지나는 바람과 비슷해서 지상의 선율을 간간이 전해 주거나, 혹은 그중에서도 천상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전해 주었다. 아침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오며, 창조의 시는 끊이질 않는다.

단지 그것을 구별해 낼 줄 아는 귀를 가진 사람이 극히 드물 뿐이다. 보트를 제외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소유한 적이 있었던 유일한 집은 가끔 여름에 여행할 때 사용했던 텐트뿐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접어서 다락방에 보관해 두고 있다.

하지만 보트는 사람들 손에서 손으로 넘겨지는 동안에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떠나 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훨씬 더 견고한 거처를 손에 넣었기 때문에 나는 세상 속에 안주하는 방향으로 어느 정도는 전진한 셈이 된다. 이 거친 복장을 한 오두막은 내 주위에 생겨난 결정체이며, 그것을 세운 나 자신을 감화시켰다.

그것은 왠지 모르게 윤곽만을 그린 그림을 연상케 했다. 나는 바깥바람을 쐬기 위해서 문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실내의 공기가 조금도 신선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실내에 있다기보다는 문 뒤에 앉아 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나는 채소밭이나 과수원에 자주 놀러오는 새들뿐 아니라 티티새, 개똥지빠귀, 붉은풍금조, 바위종다리, 쏙독새 등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좀처럼 노래하지 않는 훨씬 더 야성적이며 영혼을 흔들어대는 목소리로 우는 수많은 숲 속의 가수들과 친구가 된 것이었다.”

월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잠시 교사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일기체의 소박한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업으로 글을 쓰는 문인이 아니어서 그의 글은 알려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것은 그가 애초부터 글쓰기로 이름을 내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로웠던 까닭도 있었다.

그의 글쓰기는 주로 자연의 발견과 그에 대한 탄성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신성(神性)에 자아를 비추어 보는 쪽으로 진행되어 갔다.

“태양, 바람, 비, 여름, 겨울. 이러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자연’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깊은 은혜가 영원하고 커다란 건강과 기쁨을 선사해 준다! 그들은 인류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럴듯한 이유로 탄식하고 슬퍼하면 자연계의 모든 것이 그것에 감화되어 태양은 빛을 잃어버리고, 바람은 인간처럼 한숨을 쉬며, 구름은 눈물처럼 비를 뿌리고, 숲은 한여름에도 잎을 떨구고 소복을 입을 것이다. 대지와 나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의 일부는 이파리며, 식물의 부식토가 아니었던가.”

이런 고백과 함께 “나는 내 자신이 범해온 것보다 더 흉악한 악행이 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나만큼 나쁜 인간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볼 수가 없으리라”고 탄식한다.

웅장한 성당이나 교회의 명설교가에 감복되어 토설하는 회개가 아니라 살랑거리고 부는 바람과 햇빛에 반짝이는 연두색잎 그리고 고운 저녁놀 앞에서의 참회이고 고백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그는 도시에 살면서 한 번씩 자연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닌 아예 생활 자체를 깊은 산의 호숫가 숲 속으로 옮겨가 작은 오두막을 짓고 생활을 한다. 손수 작은 규모의 텃밭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하나가 되어 간다. 그러면서 세심하게 자연의 소리와 색채, 그리고 역동적인 혹은 미묘한 그 움직임을 기록해 가기 시작한다. ‘자연’을 부리거나 이용하거나 혹은 정복, 종속시키려는 태도가 아닌 자연에 경도되고 자연과 하나가 되고 존중하며 배우려 한다는 점에서 그는 노자(老子)를 연상시킨다.

그는 모든 종류의 쾌락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고 그중에서도 소유의 쾌락이 가장 그러하다는 것을 자각하여 호숫가에 참으로 작고 소박한 집을 짓고 소유의 금욕을 수행한 것이다. 아직 거대하고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폭풍이 몰아닥치기 전에 이미 그것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자연의 삶 속에서 그 해법을 찾은 것이다. 실로 실천하기에는 어렵지만 경청하고 배울 만한 삶의 태도여서 그가 떠난 이후 이 숲 속 작은 오두막은 명소 중의 명소가 되고 말았다.

월든적 사고가 새심 청량한 한 줄기 바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의 자본의 욕망 앞에서 무겁고 칙칙하게 변해가는 때문이리라.

(서울대 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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