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박선기 전 유엔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기사의 사진

“르완다 비극은 극렬한 이분법 탓… 한국사회도 경계해야”

아프리카 중동부의 빈국 르완다에서는 1994년 종족 갈등으로 800만 인구의 10%가량인 80만∼100만명이 집단학살로 숨졌다. 종족갈등으로 인한 내전에서 다수족인 후투족이 소수족인 투치족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이다. 후투족은 12세 여자 어린이를 잔인하게 성당으로 끌고 가 5일 밤낮을 성폭행하고 에이즈를 옮기기까지 했다. 내전이 절정인 시기 2∼3개월간에만 무려 80만명이 잔혹하게 살해됐다. 르완다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처럼 자원도 풍부하지 않아 강대국의 관심권 밖이었다. 유엔평화군이 주둔했지만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고, 증원 요구에도 유엔은 냉담했다. 소수인 투치족이 주축인 반군의 승리 후 유엔이 파견한 재판관들이 집단학살의 주범들을 처벌했다. 잔인한 인간 증오의 현장을 심판하고 최근 귀국한 박선기 전 유엔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UNICTR) 재판관을 만났다. 그는 2004년 10월부터 탄자니아 아루사에 본부를 둔 ICTR에서 집단광기에 물들었던 수백명의 살육자들을 심판했다. 1978년 제3회 군법무관 임용시험에 합격한 뒤 육군본부 법무관, 국방부 법무과장, 국방부 법무관리관 등을 역임하고 지금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ICTR(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구성은 되나. 소추는 누가 하는지.

“재판관만 모두 18명인데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및 오스트레일리아·태평양제도 각 4명, 아프리카 6명으로 구성돼 있다. 유엔이 각자 제출한 경력, 영어 인터뷰, 다양성 등을 고려해 선출했다. 수사와 소추는 유엔 사무총장이 임명하는 사람이 맡았다. 내가 재판관으로 있을 때는 감비아 출신의 잘로가 소추 책임자로 우리식으로 말하면 검찰총장 역할을 했다. 그는 감비아의 대법원장과 법무장관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전체 직원은 일반 행정 직원까지 합해서 약 800명 정도 된다.”

-탄자니아 아루사에 본부를 둔 이유가 있었는지.

“르완다 내전 발발 이후인 1992년 아루사에서 정부군과 반군이 유엔 중재 하에 내전 종식 합의를 한 적이 있다. 또 이곳은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며 각종 국제기구가 밀접해 있는 동부 아프리카의 외교 중심지이기도 하다.”

-직접 재판한 사람 가운데 기억에 남는 피고인이 있다면.

“경찰청장을 지낸 딘딜리마나 장군과 루쿤도 신부다. 르완다는 프랑스식이라 경찰도 군대식 계급이 있는데 딘딜리마나는 원래 신부가 되려는 꿈을 가진 착한 사람이었다. 또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일이긴 하지만 부하들의 과격한 행동도 막고, 곤경에 빠진 투치족을 몰래 빼내 살려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집단학살에 책임은 있지만 자기의 행동이 과연 올바른지 계속 고민하면서 나쁜 행동에 빠진 것 같았다. 말하자면 햄릿형 인간에 가까웠다. 징역 10년을 선고했는데 구금기간을 감안해 선고 당일 바로 석방했다. 루쿤도 신부는 군종 신부 출신으로 상당한 엘리트다. 검찰 측은 루쿤도 신부가 신학대학 재직시절부터 소수종족을 억압하려는 반투치적 사고를 가졌다고 증인을 내세웠는데, 변호인 측 증인과 정반대 진술을 해 상당히 애를 먹었다. 루쿤도 신부는 르완다 사태 이후 스위스에서 신부생활을 하다 현지 인도재판을 통해 기소된 인물이다. 본인은 무죄라고 주장했지만 여러 증언을 감안해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르완다 사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영혼 구원을 위해 서원한 신부가 교구 신도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세롬바 신부는 후투족의 방화와 살육을 피해 성당으로 피난 온 수천명의 투치족을 살리기는커녕 지역 경찰과 함께 살육할 계획을 세우며 성난 군중을 선동하기도 했다. 성직자까지도 상대 부족에 대한 절대 증오에 사로잡히면 그 증오가 평생을 두고 서원한 하나님보다 더 강력한 절대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세계 가톨릭계와 인류의 양심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ICTR에서 증오연설(hate speech)을 유죄로 했다는 의미는.

“변호사인 나로서는 관심이 많았고 유럽을 비롯한 다른 나라 입법례도 많이 연구했다. 르완다도 1992년부터는 다당제가 도입됐고 58년간의 벨기에 식민지 기간 동안 토속어와 불어를 의무교육에서 배웠기 때문에 문맹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 문제는 1990년부터 시작된 두 부족 간 내전이 상호 불신과 적개심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권과 군을 장악한 절대 다수의 후투부족 세력에 의한 극력한 반투치 선동행위가 언론 방송 대중집회를 통해 언론자유라는 이름 아래 무차별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가령, ‘칸구라’라는 잡지에 보도된 ‘후투 십계명’은 투치 여자와 결혼하면 반역자라고 선동하고, 후투남자는 언제나 속이며, 모든 르완다군은 오직 후투로만 구성돼야 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돼 있다. 투치족들에 대한 파괴와 폭력 살상을 부추긴 라디오르완다(RTLM) 설립자 등에 대해 증오연설 혐의를 적용해 징역 30년에서 종신형의 중형을 선고했다. 국제형사법에서 언론의 자유와 한계에 대한 매우 중요한 판례를 남겼다. ICTR의 증오연설 유죄 판결 이후 부족 갈등이 심한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EU국가 등에서도 이 규정을 만들거나 강화됐다. 트위터가 일상화된 우리나라에서도 관심 있게 연구해야 할 분야라고 본다.”

-ICTR의 설립 의미를 무엇으로 봐야 하나.

“대략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은 유엔이 르완다의 요구를 무시한 것에 대한 반성에서 집단학살자를 처벌하는 기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르완다 사태를 방치한 것을 반성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다음으로는 유엔이 주권침해 논란에도 불구하고 직접 개입해 집단학살이 국제 사법 심판의 대상이 되게 한 최초의 사건이란 점이다. 정통 형사법에서는 형사소추 및 처벌은 주권국가의 권한이라고 여겨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지만 유엔이 르완다 사태에 직접 개입해 살육자들을 처벌함으로써 미래에 같은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미리 막았다는 의미도 있다.”

-솔직히 ICTR의 한계도 있지 않는가.

“물론이다. 정부군이 지고 반군사령관이었던 폴 카가메가 르완다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투치족 살해에만 재판이 집중된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후투족은 승자의 정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투치족이 압도적으로 많은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한계를 가지면서도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집단학살에 대한 일반적 예방효과는 거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소수인 투치족과 다수인 후투족의 최근 상황은.

“카가메 대통령 취임 이후 반부패에 힘을 쏟아 나라가 안정돼가고 있다. 지금은 우리로 말하면 주민등록증에 자신이 후투족인지 투치족인지를 알 수 있는 근거를 없애 버렸다. 그렇지만 두 종족이 완전히 통합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본다. 우리 재판부에도 후투족 후손과 투치족 후손이 같이 근무했는데 서로 말도 안 하는 것 같더라. 살육의 감정이 그렇게 빨리 치유되긴 어렵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르완다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라 보나.

“우리사회는 좌우, 세대간, 지역간, 남북간 극렬한 이분법 사회로 가고 있다. 다가올 통일은 지난 70년의 이질적 두 사회가 충돌 화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자칫 3000만 북한주민들과 심각한 대립과 증오가 발생해 우리를 삼켜버릴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르완다의 비극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고 본다.”

-남북갈등 조장을 선동행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나.

“통일 과정에서 극렬한 소요와 선동 언행이 있다 하더라도 대량학살 관련 범죄로 보기는 어렵다. 대량학살은 인종 종교 종족 국적의 4가지 가운데 하나 이상에 속해야 하는데, 남북갈등은 굳이 적용한다면 국적으로 판단해 볼 순 있다. 대량학살 범죄 바로 아래 단계에 반인도적 범죄가 있는데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대목이다.”

-우리나라도 선동행위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보나.

“르완다 사건은 발전이 덜 된 아프리카이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독일도 인본주의가 발전한 나라였지만 히틀러가 나타났다. 우리도 북한 주민이 남한 주민과 섞이게 될 때 소외감, 차별 등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그는 8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국제형사재판관으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한국에 들어와 있는 많은 외국인과 탈북자들의 인권상황 개선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국제기구 진출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어학 실력 연마와 함께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에 무보수라도 인턴으로 일할 것을 권했다. 인턴은 보수를 주지 않아 들어가기도 쉬우며 경력 면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울러 국제화에 걸맞게 국제기구 인턴지원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머나먼 아프리카 소국의 비극적 이야기를 오랫동안 듣고 나니 문득 우리 현실이 갑갑해졌다.

◎ 르완다 사태란

아프리카 중동부에 자리 잡은 르완다는 소수 이민족이 다수인 토착세력을 물리치고 왕국을 세우면서 갈등이 시작돼 결국 세계사에 기록될 정도의 종족 갈등을 겪었다. 르완다 사태는 1994년 다수인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 주베날 하비야리마나의 암살 사건으로 50여만명의 투치족(소수족)이 살해되면서 절정을 이뤘다.1992년 국제사회의 중재로 아루사 협정이 맺어져 두 종족의 갈등이 주춤하다 대통령 암살로 집단학살이 본격 시작된 것이다. 이후 투치족 반군 조직인 르완다애국전선이 반격을 가해 7월 4일 수도인 키갈리를 함락시켰으며 이때 수도에 갇힌 6만여명의 후투족 민간인들은 반군의 보복이 두려워 필사적으로 탈출하다 극심한 식량 부족과 콜레라 등 전염병으로 많은 난민이 죽었다. 원인은 뿌리 깊은 종족 갈등. 르완다는 14세기 이 지역에 진출한 소수 투치족(14%)이 왕국을 세워 토착부족인 후투족(85%)을 지배했다. 그러다가 1916년부터 벨기에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뒤 벨기에의 철저한 종족 차별 정책으로 두 종족 간 갈등이 시작되었다. 1959년 투치족 왕이 죽자 투치족의 한 부족이 정권을 잡고 후투족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후투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살아남은 투치족 어린이들이 이웃 우간다로 도망갔다. 1990년 우간다로 망명한 5000여명은 르완다애국전선(RPF)을 결성하고 르완다를 침공했다. 이후 오랜 내전이 시작되었다.

만난사람=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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