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걸기-김혜림] 문제는 정책이야! 기사의 사진

25년 전 이맘때 일로 기억한다. 그때 첫아이를 낳고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친정엄마는 하루 세 끼 따뜻한 밥에 미역국을 차려냈다. 저녁나절 국을 끓이시면서 엄마는 말했다. “얘, 너도 ‘홍숙자’ 찍어라!” TV 보시던 아버지가 볼멘소리로 받았다. “뭐야? 사표(死票)를 왜 만들어. 될 사람을 찍어야지!” 그러자 엄마는 목청을 높였다. “왜 죽은 표유? 여자들이라도 여자 후보 찍어서 힘을 보여주자는 건데!”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는 16년 만에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는 선거였지만 분위기는 침울했다.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두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군부통치 청산, 문민통치 실현이 물 건너갈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 후보가 등장했다. 사회민주당의 홍숙자. “여자가 대통령을 넘봐! 예끼!” 길거리에 붙은 그의 사진 앞에서 주먹밥을 먹이는 남성들도 적지 않았다. 여성들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친정엄마는 예외적인 그룹에 속하는 경우였다. 결국 홍 후보는 대선을 열흘 남짓 앞두고 사퇴했다.

14대(1992) 대선 때도 ‘남장(男裝) 여성’ 김옥선 후보가 무소속으로 도전장을 냈다. 유신정권 비판에도 앞장섰던 3선 의원이었지만 8만6000여표를 얻는 데 그쳤다. 이후 대선에서 여성 후보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20년 만에 여성 대통령 후보가 나섰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다. 요즘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강산이 두 번 변할 만큼 긴 시간이 흐르기도 했지만 세상은 많이 변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은 이제 자료로서의 가치밖에 없을 듯하다. ‘여성 대통령 탄생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긍심’이라는 새누리당의 용비어천가는 물론 ‘생물학적으로만 여성’이라는 민주당의 비아냥도 ‘여성’이라는 사실이 외려 프리미엄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정치는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진 이 시대에 보수적인 성(性)역할론이 되살아나는 것은 왜일까? 지난 2일 내놓은 새누리당의 성명서에 따르면, 여성을 위한 박 후보의 정책은 △여성의 일·가정 양립 △사교육비와 고단한 사교육 학원 찾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복교육 △4대 중증 질환 국가 부담 △경증 치매 환자에 대한 의료혜택 확대다.

여성의 일·가정 양립 정책은 1990년대 등장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까지 빠지지 않는 단골 과제다. 물론 아직 해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중요 정책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겠으나 그 실천과제가 특별한 게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나머지는 여성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새누리당은 이 정책들이 엄마의 양육 부담, 아이 교육에 올인해야 하는 엄마의 교육 부담, 병석의 부모님 간병을 맡아야 하는 며느리와 딸들의 부담을 덜고 힘이 되어주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자녀 양육과 교육, 병든 가족 돌봄 노동이 온전히 여성 몫이란 얘기다.

새누리당은 이 성명서 앞머리에 “출산, 보육, 교육, 장바구니 물가가 여성의 전담이라고 보는 민주당의 모욕적이며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거울보고 삿대질하는 꼴이다.

박 후보는 ‘정치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는 비난에 ‘호주제 폐지에 앞장섰다’는 따위의 변명 대신 앞으로 어떤 여성정책을 펴겠다는 청사진을 내보여야 한다.

김혜림 산업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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