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호 칼럼] 대학을 보면 미래가 암울하다 기사의 사진

“교육과 지성 사라진 불안지대… 폭력적 용어 ‘SKY’부터 언론에서 추방하자”

또다시 대한민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아니라 대학입시 이야기다. 안철수 후보가 강연한 부산대 경암체육관은 자리가 많이 비었지만 사설학원의 입시설명회가 열린 잠실체육관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지금 수능시험을 마친 고등학교 3학년생과 학부모들은 인생에서 가장 고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모든 인맥과 정보망을 가동해 고등수학을 풀듯 입시전략에 몰입하는 시즌이다.

신문을 뒤적여도 대학과 관련된 기사와 광고가 많다. 지난 월요일에 배달된 한 조간신문을 보니 본지 36면 가운데 12면에 대학 광고가 실렸다. 선진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신입생 모집부터 교수 초빙, 이미지 광고까지 다양하지만 하나같이 내거는 슬로건은 ‘글로벌 리더’다. 하이브레인넷 같은 전문 사이트로 충분할 텐데 일간지 광고에 매달린다.

대학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가혹한 경쟁 시스템의 산물이다. 경쟁은 긴장을 가져오고 지나친 긴장은 불안을 유발한다. 대학의 불안은 기본적으로 학령인구 감소에 기인한다. 삼남지방의 대학들에서 시작한 그림자는 서서히 북상해 불원간 수도권을 어둡게 물들일 것이다. 2020년에 대학 정원 60만명에 고교 졸업생 47만명으로 역전된다.

정부도 대학을 벼랑으로 몬다. 예산이 든 봉투를 흔들며 줄을 세운다. 방식은 선택과 집중이다. 경쟁력을 높인다는 이름 아래 잘하는 대학에 돈을 몰아주고 그렇지 못한 대학은 굶는다. 돈 놓고 돈먹기다. 돈을 많이 받은 대학은 그 돈으로 투자를 하니 더 좋은 대학이 된다. 경쟁에서 탈락한 대학은 반대의 길을 걸으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언론의 대학 평가는 어떤가. 대학별 특성을 파악하는 자료의 성격보다 종합순위를 앞세운다. 랭킹에 민감하지 않은 곳이 없어 지표 중심으로 움직인다. 40명 수강생을 데리고 강의하던 과목이 80명으로 늘면 교육지표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교수들의 시수가 낮으면 점수를 더 받기 때문이다. 자국에서는 대학 문턱도 못 갈 외국인이 한국 대학가를 점령하고 있는 현상도 국제화 지표와 연관성이 있다. 언젠가부터 대학들은 배치표를 만드는 학원들에게도 휘둘린다.

대학이 이렇게 모욕을 받고 있는데도 교수사회는 침묵한다. 대학에서 교육이 사라지고 지성의 기반이 무너져도 오불관언이다. 대선 캠프에 들어간 수많은 폴리페서들은 지위와 권력을 보장하는 나랏일에 관심 있을 뿐 정작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내 문제는 외면한다. 대학이 망가지고, 캠퍼스에 인성이 사라져도 연봉 1억 넘는 직장인으로 만족하고 있다.

대학의 위기는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꿈을 잃고 상처만 가득 안은 채 졸업한 젊은이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어나갈까. 그런데도 대학은 질문하지 않는다. 학벌사회를 공고히 하는 정부의 태도는 옳은가. 상위 2%를 제외한 98%의 학생을 패배자로 만드는 입시 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재벌이 들어온 학교의 순위가 올라간다고 희희낙락할 것이라면 LG나 SK, 현대차그룹을 대학의 주인으로 맞는 것이 이상적인가.

여기에는 ‘설·연·고’라는 선도대학들의 책임도 크다. 사실 ‘SKY’라는 말은 학원가의 용어이므로 공적인 자리에서는 쓰지 말아야 한다. 그 어휘가 담고 있는 폭력성과 배척의 의미 때문이다. 전국에 ‘S대’를 쓸 수 있는 대학이 30개 정도, ‘K대’로 부를 수 있는 대학은 40여개에 이른다. 일찌감치 이니셜을 차지한 이들은 용어의 카르텔을 형성하며 특권을 즐길 뿐 사회적 책무를 외면하고 있다. 오늘날 대학의 위기를 걱정하는 지성의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얼마 전에 읽었던 책 내용이 생각난다. 핀란드에서 주민에게 “이 나라에서 어느 대학이 가장 좋은가요?” 물었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더란다. “어떻게 그런 질문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학별로 다 개성이 있다는 뜻이다. 핀란드인의 행복이 아름다운 자연이나 훌륭한 복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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