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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이명희] 일본 따라간다는 경고음

[여의춘추-이명희] 일본 따라간다는 경고음 기사의 사진

“저성장 늪 접어든 한국경제… 성장엔진 다시 돌릴 서비스산업 선진화 등 시급”

10여년 전만 해도 미국 전자유통점 베스트바이 등에 가면 소니나 파나소닉, 샤프 등 일본 전자제품들이 즐비했다. 삼성전자나 LG전자 제품은 한켠 구석에 처박혀 있어 간신히 찾아볼 수 있고 가격도 소니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싸게 매겨져 있었다. 도로에는 도요타자동차가 넘쳐났지만 현대차는 가물에 콩 나듯 보여 어쩌다 현대차를 발견하면 탄성을 지르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공항에서부터 ‘SAMSUNG’ 광고판이나 삼성이 만든 제품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현대차도 자주 눈에 띈다. 삼성은 ‘소니 따라하기’를 통해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기업들 사이엔 ‘도요타 배우기’가 유행이었다.

하지만 영원히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았던 전자왕국 일본은 잃어버린 20년간 장기 불황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면서 쇠락의 길로 들어선 지 오래다. 세계 가전시장을 호령하던 소니와 파나소닉 등은 줄줄이 공장 문을 닫고 있고 수백∼수천명씩 해고자들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은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가고 있고, 국가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200%를 넘어 신용등급을 강등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요즘 우리나라가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는 경고음이 잦아지고 있다. 일본 노무라연구소가 2010년 4월 우리 경제가 일본식 장기 불황의 문턱에 서 있다고 진단했을 때만 해도 펀더멘털이 튼튼하고 부동산 시장 급락을 막을 장치를 단단히 해놨기 때문에 일본과는 다르다고 정책 당국자들은 항변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대니얼 앨트먼 뉴욕대 교수는 최근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에 ‘일본처럼 되는가-한국의 기적은 이게 끝인가’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은 경제성장 엔진이 꺼진 일본의 길을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일본과 닮아간다는 근거로 경제성장률이 계속 낮아지는 가운데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점을 들었다.

전문가들의 진단이 아니더라도 일본을 따라가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 경제 성장률은 올해 2%대에 이어 내년에도 3%대에 머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미 경제분석 기관 콘퍼런스보드는 우리나라 성장률이 2013∼2018년 평균 2.4%에 이어 2019∼2025년에는 1.2%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2030∼2060년 우리 경제 성장률이 평균 1.0%에 그쳐 42개국 중 룩셈부르크에 이어 꼴찌에서 두 번째일 것으로 예상했다.

우리 경제는 이미 저성장 늪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저성장의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강소기업들이 지탱해 주는 일본과 달리 GDP의 75% 이상을 소수 대기업에 의존하는 허약한 구조이고, 지금도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인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대기업 규제를 하려 할 때마다 방패막이로 튀어나왔던 경제위기론이라고 무시해버리기엔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그런데도 성장 엔진을 다시 돌릴 정책들은 진보와 보수 패거리 싸움에 한발짝도 못 나가고 있다. 수출의존형 구조를 바꾸기 위해 10년 동안 추진한 의료·금융·법률 서비스산업 선진화가 그 예다.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 폭락을 시작으로 동남아 국가들이 외환위기를 겪을 때 우리나라도 경고음이 울렸지만 정책 당국자들은 펀더멘털이 튼튼하다며 무시했다.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대기업들을 부도내지 말라며 구조조정을 미뤘다. 환란 주범으로 몰려 청문회까지 섰던 강경식 전 부총리는 “태국에서 시작된 통화위기가 동남아 이웃나라로 번지는 것을 보면서도 경제 기초여건만 튼튼하면 감염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로 치닫는 길에 들어섰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환란일기’에서 고백했다. 일본과 우리는 다르다면서 손놓고 있는 누군가가 또 청문회에 서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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