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反신자유주의자 장하준 교수 “경제민주화 핵심은 복지확대와 고용안정에 있다” 기사의 사진

한국 사회는 지나치리만큼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진영 논리에 매몰돼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이런 식의 딱지 붙이기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경제학자가 있다. ‘자본가 편이냐 노동자 편이냐’가 거론될 때 자본가와 노동자의 타협을 주장하고, ‘시장이냐 정부냐’라는 구도에서는 정부 개입을 더 강조하며, ‘점진적이냐 급진적이냐’의 논리에서는 점진적인 개혁이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바로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다. 장 교수에게 요즈음 대선 정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를 중심으로 한국 경제가 나아갈 길에 대해 물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8일 국제전화를 통해 이뤄졌다.

장 교수에게 우선 헌법 119조 2항에 담긴 경제민주화와 현재 대선 후보들이 거론하고 있는 내용과의 비교를 요청했다. 대뜸 장 교수는 “헌법 조항에서 말하는 균형성장, 적정소득분배, 기업의 시장지배력 남용 방지, 경제주체 간의 조화 등은 목표라고 할 수 있고, 구체적인 방법들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경제민주화를 달성하는 데에는 복지확대, 노조 강화, 협동조합 장려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보들이 말하는 경제민주화 담론들에서는 주로 재벌문제, 특히 재벌의 지배구조가 지나치게 강조돼 있다”고 지적한다.

-후보들의 경제민주화 주장이 유권자들을 의식한 듯한 인상이 짙다.

“진짜 유권자들을 인식한 것인지 모르겠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복지제도를 정비하고, 불안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고용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 돼야 한다고 본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멕시코를 제외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비율이 약 10%로 가장 낮다. 반면 비정규직 비율은 가장 높다. 과거 고도성장기에는 고용이 불안해도 일자리를 바로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 지배구조 개혁이 시급한 것일까.”

-순환출자 해소, 금산분리 등을 그만두고 재벌의 지배구조를 용인하자는 뜻인가.

“재벌 개혁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순환출자, 금산분리 등이 역사적인 산물임을 인식하는 일이다. 한국의 산업화는 기업집단을 통해서 다각화, 고도화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재벌이었는데 1970년대 말부터 정부가 세제혜택을 앞세워 지분분산을 유도했다. 이에 재벌들은 보유지분을 매각했는데 그 과정에서 계열사 지배구조 유지를 위해 순환출자가 시작됐다. 그런데 90년 후반부터 정부는 순환출자를 문제 삼기 시작했으니 재벌들로서도 난감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반면, 재벌들이 지금처럼 성장한 데에는 국민들의 도움이 컸다. 국내산업 보호정책에 입각해 재벌들은 국민 세금으로 보조금 지원을 받아왔고, 값 싸고 질 좋은 외국상품 대신 재벌기업 상품에 만족하면서 지지하고 키워준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재벌은 지나온 역사에서 국민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재벌개혁을 둘러싸고 이 같은 역사성과 재벌의 국민에 대한 빚 갚기가 함께 거론돼야 한다. 재벌의 지배구조만 바뀐다고 국민들의 복지와 고용안정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순환출자의 대안으로 거론되어온 지주회사 체제는 어떻게 봐야 하나.

“그것도 해법 중 하나다. 그렇지만 지주회사를 처음부터 용인했으면 모르겠으나 갑자기 허용을 하면서 그것만이 해법이라는 식의 주장은 좀 아닌 것 같다. 재벌 나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기업집단법을 만들어서 꼭 지주회사 형태는 아니더라도 사실상 하나의 집단으로 운영되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총수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해서 사회적으로 통제하도록 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 지주회사 체제도 문제가 있다. 지주회사는 기업을 포트폴리오식 금융투자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기업을 다각화하고 업그레이드시켜 발전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심한 경우는 돈 되는 기업을 빨리 팔고 새로 만드는 식으로 운영할 위험성이 있다.”

-산업자본이 금융기관을 사금고화할 수 없도록 하는 금산분리는 필요한 게 아닌가.

“금산분리의 취지는 충분히 공감한다. 다만 금산분리를 ‘좋다, 나쁘다’라고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다. 예컨대 영국, 미국은 금융과 산업이 너무 분리되어 잘못됐다는 의견이 많다. 금융기관이 장기투자를 외면하고 단기적인 이윤만 좇는다는 것이다. 반면 독일, 일본은 금융과 산업이 잘 융합해서 잘 돼 왔다고 평가한다. 산업자본의 사금고화가 정 걱정이라면 ‘계열사기업 대출금지제도’를 운영해도 될 것이다.”

-재계는 ‘합의 없는 경제민주화는 무차별 기업 때리기’라고 주장한다. 경제민주화에서 재벌이 해야 할 몫은 무엇인가.

“전향적인 변화를 가져오려면 재벌 스스로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한다. 그런데 재벌들은 지배력 유지라는 너무 좁은 시각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대선 후보들이 자신들을 이지메하려고 한다는 식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으니 진전이 없다. 재벌들이 지배구조에 연연하지 않고 국민에게 진 빚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통 크게 나아갈 때 국민들도 재벌의 존재를 받아들일 것이다.”

-장 교수는 지난 9월 한 강연에서 경제민주화의 지향점이 ‘시민권에 바탕을 둔 복지국가’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민주란 단순히 국민을 위한다는 뜻이 아니라 국민 주권에 바탕을 둔 것이고 주권은 결국 시민권에 나오는 것이란 뜻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1인1표를 강조하듯이 경제민주화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혜택을 추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재벌의 골목상권 침해는 막아야 하지만 이는 중소상인들에게만 해당되지 농민에게는 아니다. 노조 권한 강화도 필요하지만 이는 노동자에게만 해당될 뿐 은퇴 노인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시민권을 핵심에 두고 그 외 각 분야별로 필요한 범위 내에서 적용, 추진해야 한다.”

-주식회사의 주주총회 의결방식인 1원1표 원칙을 고수해온 자본주의 하에서 1인1표를 주장하는 것은 기업의 소유를 사회적 소유, 국가적 소유로 전환해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기존의 1원1표 원칙은 자본주의의 이윤동기 부여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1인1표 원칙을 부분적으로 도입해 지나친 1원1표 원칙의 자본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원칙을 절대적으로 고수, 자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상호 견제를 위해 적절하게 분야별로 섞어야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장 교수는 평소 노동자의 경영참여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노동자가 기업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라는 점이다. 주주들보다 훨씬 기업의 장기적 이해관계에 밀접해 있다. 주주는 주식을 팔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노동자들은 회사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다음으로 노동자의 동기부여다. 과거 저임금으로 승부할 때와 달리 지금은 노동자 개개인의 기술과 창의가 없으면 기업은 경쟁을 할 수 없다. 이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려면 이들의 목소리가 경영에 반영돼야 한다.”

-구체적인 방안을 든다면.

“독일의 경우 경영체계가 이중이다. 경영진만이 참여하는 ‘경영이사회’와 노동자 선임이사가 절반을 차지하는 ‘감독이사회’가 있는데 이 중 감독이사회가 최고경영기구다. 물론 거의 노사 타협을 통해 운영되는데 상당히 급진적인 방식이다. 한국에서 하루아침에 도입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기업에 대해 잘 모르는 대학교수들이 사외이사로 활동하는 정도라면 기업을 잘 이해하는 노동자 중에서도 몇 명이 경영에 참여토록 하는 게 훨씬 낫다고 본다.”

-복지제도와 경제성장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나라가 지금 복지를 왜 확대해야 하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다 같이 잘살자’라는 측면도 있으나 더 중요한 것은 복지제도 정비 없이는 경제성장이 안 되는 단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한 분야에서 실직해도 3∼4주 재교육 받으면 재취업이 가능했다. 하지만 오늘과 같은 고기능 첨단산업분야에서는 재교육, 재취업을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있어 이를 복지체계가 뒷받침해줄 수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증세 없는 복지도 가능한가.

“복지 더 하자면서 증세 안 하겠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GDP 대비 1∼2% 정도는 정부예산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거나 불필요한 데 쓰지 않는 것으로 가능할 수 있을지라도 현재의 10% 수준에서 20% 수준으로 가려면 증세 없는 복지는 몽상일 뿐이다.”

-세금 내기를 모두들 꺼려하는데.

“사람들은 세금을 내면 그 돈은 모두 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세금이 학교요, 병원이요, 도로인 것처럼 복지국가를 종합사회보험을 공동으로 구매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한국의 상황에서 북구형 ‘높은 세금-높은 복지수준’이 가능할까.

“하려고만 생각한다면 안 될 것도 없다. 스웨덴도 영국보다 90년 늦은 1932년에야 소득세를 도입한 나라였지만 오늘날은 세계적인 복지선진국으로 변신했다. 복지선진국은 하루아침에 안 된다. 그렇지만 차근차근 추진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GDP 대비 복지지출을 매년 1% 포인트 올려간다면 10년 후엔 적어도 미국정도의 수준에는 이를 것이고, 이어 다시 꾸준히 확대해 간다면 유럽수준에도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한국 경제가 저성장 기조로 들어섰는데 앞으로 바람직한 방향은.

“한국 경제는 외부의존도가 큰 나라라서 글로벌 경제의 변화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우리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할 일이 많다. 우선 대외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대일수입이 줄어들 수 있도록 기계, 소재 분야의 산업을 집중 육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제대로 된 산업정책 필요하다. 중소기업 연구개발은 정부가 맡아주고 새로운 성장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높은 대외의존성을 감안할 때 글로벌 외국자본의 유출입이 늘 걸리는 문제다.

“한국처럼 비기축통화국은 글로벌 자본시장이 흔들리면 바로 얻어맞는다. 환율 변동은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기 때문에 가장 나쁘다. 때문에 외환 유출입에 세금을 부과하는 ‘토빈세’ 등을 도입해야 한다고 본다. 요즘은 국제통화기금(IMF)도 토빈세 도입에 적극적이다.”

장 교수는 한 시간 남짓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자신의 여러 주장들이 다소 거칠고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생각은 다양한 것이니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고 말했다. 스테레오 타입의 논리에서 벗어나 국민이 잘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는 진보도 보수도, 좌도 우도 없는 것이라는 뜻이겠다.

장하준 교수(49)는

한국인 최초의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로서 활발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벌이고 있는 대표적인 반(反)신자유주의론자다.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후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장 교수는 27세 때인 1990년, 박사학위를 받기 1년 전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교수로 임용될 정도로 일찍부터 학계에서 인정을 받았다.

선진국들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자국 산업보호 정책을 비판하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 경종을 울린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2002)로 유럽진화정치경제학회(EAEPE)의 ‘뮈르달 상’을 2003년 받았다. 뮈르달 상은 EAEPE가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군나르 뮈르달을 기리기 위해 신고전파 경제학의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수여하는 것이다. 또 2005년에는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예프 상’을 최연소로 수상했다. 그 외 저서로 ‘개혁의 덫’(2004), ‘나쁜 사마리아인’(2007),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2010),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공저, 2012) 등이 있다.

장 교수는 부친이 민주당 3선 의원과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한 장재식씨로 그의 가문에서는 독립운동가, 정치인, 관료, 학자 등을 두루 배출했다. 사촌 형인 장하성 교수는 현재 안철수 무소속 후보 대선캠프의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다만 인터뷰에서 장 교수는 정치에 입문할 뜻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사회에는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은 유용한 지식을 발굴해 세상에 제공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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