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기독교계 대표적 진보 원로 박상증 목사 “대한민국 정통성 인정 여부가 대통합의 전제돼야” 기사의 사진

2013년 새해에는 대통합의 시대가 열릴 것인가. 2주 전 대선의 열기가 아직 다 식지 않았기에, 새 시대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강렬하기에 기대와 더불어 걱정이 앞선다. 이에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진보 원로 박상증(82) 목사, 지난 대선에서 주변의 예상을 깨고 박근혜 당선인을 지지하면서 대통합의 필요성에 공감했던 박 목사에게 그가 생각하는 새날의 기대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31일 박 목사의 서울 녹번동 자택에서 이뤄졌다.

구불구불 골목을 지나 닿은 낡은 단독주택의 작은 대문 앞. ‘박상증’ ‘이선애’, 나란히 붙은 문패가 먼저 눈에 띈다. 부인 이선애 목사와는 십수년 전에 사별했는데도 차마 문패를 떼 내지 못한 것일까. 대문을 열자 백구 두 마리가 반긴다. 초면인데도 꼬리를 치는 것을 보면 손님맞이에 이골이 난 듯했다.

거실로 들어서자 박 목사가 활짝 웃으며 반긴다. 여든을 훌쩍 넘긴 박 목사의 패션이 젊은이 못지않다. 자주색 터틀 스웨터에 베이지색 면바지가 퍽 잘 어울렸다.

국민대통합에 마음이 꽂히다

-박근혜 당선인을 지지하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진보의 보수화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보수 중에도 개혁의지가 있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 특히 국민대통합을 주장하는 것이 신선했어요.”

-‘진보의 보수화’란 무슨 뜻이에요.

“우선 지난 봄 19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원칙도 없이 선거에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임하다 결국 패배했지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과도 기꺼이 손을 잡고 세를 확보하려고만 했거든. 이런 게 진보의 보수화지. 한국의 좌파, 진보파는 보수화되고 있어요.”

-대선 이전부터 진보파에 대한 비판이 있었네요.

“시민운동조차 진영화돼 있어요. 야당 비례대표 의원자리를 얻어놓을 정도로 공공연한 기득권 세력으로 치달으면서 진보 운운하는 것은 건전하지 않은 거지요. 그런 흐름에 대해 이번만은 분명하게 저항의 표시를 하고 싶었거든요.”

-오랫동안 시민운동에 몸담아 오신 분답지 않네요.

“어디서나 근본주의가 문제인 경우가 많은데 그중에서 시민운동의 좌파 근본주의가 가장 심각해요. 기독교 근본주의는 신앙 안에서의 주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르침을 중시하지만 좌파 근본주의는 이념이 우상화돼 있어 거의 제어가 불가능하거든요.”

-진보의 보수화에 대한 불만, 좌파 근본주의에 대한 경종 차원에서 일부러 박 당선인을 지지한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런 측면이 없지 않죠. 분명한 점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해온 세력은 1948년 이후 전혀 진화하지 않았으며 이들과 손잡으려는 세력에는 정권을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에요. 평소에도 그와 같은 내용을 주장해 왔지만 이번엔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 다를 뿐이지요.”

원칙 세우되 배제보다 설득을

-박 당선인 쪽과 사전 교감 있었던 건 아닌가요.

“없었어요.”

-국민통합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잖아요.

“국민통합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사양했어요. 정치엔 경험도 없는 내가 거기에 끼어든다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실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앞섰거든요.”

-어느 때보다 첨예한 대결구도였던 만큼 박 당선인의 국민대통합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폭넓게 봐야 하겠으나 대통합의 대원칙이 있어야 돼요. 그 첫째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겠지요. 그렇다고 종북파를 전부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고요. 배제가 아니라 설득을 해야지요. 더구나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48% 중 종북파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단지 특정지역 인사를 중용하는 정도의 대응만으로는 어렵겠지요.”

-해외에서 활동할 때 남북교회 교류를 유도하는 등 통일운동에 관여해 왔는데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주문은 없나요.

“그동안 숱한 통일론이 있었지만 국민에게 그리 감동을 주지 못했어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통일론은 공감대 형성이 부족해 남남갈등을 낳았고 국민전체 통일에는 역행했지요. 현 정부는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새 정부의 전략은 아직 잘 모르겠으나 북한에 대해 비판할 것은 하고 인도적 지원도 추진하되 건전하고 원칙 있는 접근이 필요하겠지요.”

-남북 정상회담 얘기도 나왔는데요.

“정상회담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봐요. 사전에 충분한 물밑 접촉과 작업을 해야지 무턱대고 추진해서는 안 돼요. 비밀주의보다는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행태를 고민해야 할 겁니다.”

통일·다양성 추구하는 에큐메니컬운동

대통합은 사실 박 목사의 평생의 과업이었다. 바로 에큐메니컬(교회일치)운동이다. 그가 국민대통합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도, 한국에 영구 귀국한 1990년 이후 시민운동에 깊숙이 참여한 것도 에큐메니컬운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큐메니컬운동은 좀 낯선 말인데요.

“에큐메니즘은 ‘통일과 다양성(unity and diversity)’을 지향해요. 일치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에도 초점을 맞추자는 의미지요. 서로 얼마나 다르냐를 따지기보다 같은 게 얼마나 많은가를 확인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협력하고 공존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지요.”

-에큐메니컬운동과 대통합은 통하는 바가 있네요. 한국 교계의 에큐메니컬운동 상황은 어떤가요.

“에큐메니컬운동은 원칙적으로 기독교연합회 운동인데 현재 한국 교계는 지나치게 개교회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어요. 그뿐 아니라 연합회운동이 연합회사업, 예를 들어 성경·찬송판매 및 교육사업 등을 함께 하면서 이익을 나누는 일에 초점이 모아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한국은 해외선교사를 무수히 배출하고 있는데요.

“맞아. 하지만 개교회 및 개교단 선교사들의 총합이 많다는 것이지요. 상호간의 연대와 협력은 그리 찾아보기 어려워요. 서구에서 18세기 이후 해외선교사 파견이 활발해지면서 교단 간 경쟁이 심해지자 이를 조율하고 협력하자는 차원에서 등장한 것이 에큐메니컬운동의 밑바탕이었는데 한국 교계는 아직 그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셈이지요.”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WCC) 부산 총회가 열리는데요.

“이번 기회를 잘 살려서 우리나라에서도 WCC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에큐메니컬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펼쳐졌으면 좋겠어요. 교회 간, 교단·교파 간 연대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시민운동에도 영성이 필요하다

-에큐메니컬운동이 교회 안과 밖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을 없애자는 것으로도 해석된다면 시민사회와 교회의 연대는 필연적인 것이겠네요. 박 목사께서는 시민운동에도 깊이 관여해 왔는데 우리의 시민운동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중앙만 있고 로컬(지역, 지방)이 없다는 데 있어요. 중앙 인사들은 정치권을 기웃거리게 되고 급기야 특정 정당의 정치세력과 밀착되고 기득권에 취하기 일쑤거든요.”

-어떤 것을 경계해야 하나요.

“시민운동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해요. 특정 정치노선에 휩싸이게 되면 운동은 썩을 수밖에 없으니….”

-시민운동에도 ‘영성(靈性)’이 필요하다면서요.

“교회만 영성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다른 할 일을 제쳐놓고 시민운동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라는 마음 다짐, 그게 시민운동의 영성이거든요. 영성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해요.”

-바람직한 시민운동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떤 운동이든 3대가 같이 해야 견고하고 역량이 생겨요. 예를 들어 청년들만 모이는 교회가 10년이 지나도 같은 상황이라면 문제지요. 교인들이 앞문으로 들어와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교회는 발전을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시민운동도 젊은 현역, 선배들, 노인세대의 3대가 함께 묶여 나가야 힘이 있어요.”

박 목사는 요즘 시민단체의 신참 간사들에게 제대로 된 선배간사가 부족해 좋은 자극이 없는 것도 문제로 꼽는다. 마지막으로 새해를 맞아 우리 사회와 교회에 덕담을 부탁했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동북아시아에서 첫 여성대통령이 탄생하는 등 기대가 큰 때입니다. 여기에 한국교회가 해야 할 몫이 적지 않습니다. 자체 성장논리에만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나아가 통일운동에도 공헌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상증 목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에큐메니즘(교회일치) 운동가다. 해방 직후 서울대 예과를 거쳐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좌우의 격심한 대립을 겪으면서 1949년 도미, 애즈베리대와 애즈베리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에큐메니컬운동 연구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부친은 한국전쟁 때 납북된 초대 성결교총회장 박현명 목사다.

58년 귀국 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61∼67년)를 거쳐 1967년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계교회협의회(WCC) 실무자로 활동했고, 81∼90년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CCA) 부총무·총무를 맡았다. 박 목사는 국내 민주화운동을 해외에서 지원하는 것은 물론 남북교회 교류에 물꼬를 튼 84년 일본 도산소회의, 86·88년 스위스 글리온회의 등의 실질적인 산파역을 맡았다.

육순을 맞은 90년 재차 귀국해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에 취임, 연구와 에큐메니즘 강의를 겸하는 한편 91년 여성신학자인 부인 이선애 목사와 함께 갈현교회를 개척했다. 97∼2007년 참여연대 공동대표, 99∼2012년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99년 부인과 사별했으나 지금도 청년 같은 열정으로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만난사람=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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