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성낙인] 대법원의 재판지연 안된다 기사의 사진

대법관 1인당 한 해에 3000건 이상의 사건을 처리한다. 가히 살인적인 숫자다. 주말을 제외하면 하루 평균 11건 이상을 처리한다. 사건당 처리 시간이 1시간을 채 넘기 어렵다. 대법관 임기 6년 내내 과다한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오죽했으면 대법관에 임명되는 날만 행복했다는 자조의 한숨이 절로 나올까.

대법원에서 심리기간 2년을 넘긴 장기미제 사건 464건이 또 한 해를 넘겼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이 낸 고엽제 소송은 1999년 제소된 이래 대법원에만 8년째 계류 중이다. 칠순에 이른 노인들이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재판은 지연만 거듭한다. 외국인노동자들의 노조설립신고 사건, 한·미 FTA 반대시위 사건도 오리무중이다. 외형적으로는 대법원의 평균 심리 기간은 100일을 조금 넘는 정도다. 그 정도면 참을 만하다. 하지만 논쟁적인 사건일수록 심리 기간은 수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당사자들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재판결과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재판의 생명은 실체적 진실 발견이다. 하지만 진실을 발견하느라 시의성을 상실한다면 그 진실은 자칫 휴지조각이 돼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재판의 공정성 못지않게 중요한 덕목이 신속성 즉 가부간에 빨리 결론을 내려주는 것이다. 우리 헌법도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형사피고인은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지체 없이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제27조 제3항)라고 하여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1심 2심을 거쳐서 대법원까지 재판받다 보면 승패 여부를 떠나 이미 패가망신했다는 조소가 넘쳐난다. 대법원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일이 났다 하면 삼세판에 익숙하다 보니 무조건 대법원에 상고하고 본다. 그러니 대법원에 사건이 넘쳐난다. 대법관의 사건 처리를 돕는 부장판사급인 재판연구관만 100명이 넘는다. 대법관의 사건이 적체되다 보니 어지간한 사건은 재판연구관들이 처리한다고 하여 심지어 대법원의 재판이 연구관재판이라고 비하되기도 한다.

대법원도 신속한 재판을 위해 상고를 줄이는 방안을 고민해 왔다. 상고허가제를 도입해 봤지만 국민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위헌적 소지가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에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상고심리불속행(上告審理不續行) 제도를 만들어 실질적인 상고허가제를 시행하고 있음에도 재판은 계속 지체되고 있다.

이제 피상적인 제도개혁으로는 대법원의 재판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대법관 숫자의 대폭 증원이지만 현시점에서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법관 몇 명의 증원으로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고등법원에 상고부를 설치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무릇 상고(上告)는 대법원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들의 일반적인 법감정도 최고법원의 재판을 한번 받아보자는 입장이다.

결국 지금보다 신속하게 재판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대법원에 재판부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것이다. 즉 대법관이 재판장을 하면서 고등법원 부장판사급이 배석하는 방식으로의 혁신적인 전환이다. 이렇게 하면 지금 대법원에 설치된 3개 부가 12개 부로 증가된다. 네 배 이상의 부가 증가되면 재판은 저절로 빨라질 것이다. 이는 현행 헌법 체계에서 가능한 모델이다. 헌법은 ‘대법원에 대법관을 둔다. 다만,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대법관이 아닌 법관을 둘 수 있다’(제102조 제2항)라고 규정하고 있다.

최고법원인 대법원은 자유와 권리를 침해당한 국민이 하소연할 수 있는 최종·최후의 보루이다. 이제 더 이상 국민들이 대법원의 재판 결과를 바라보다가 목이 빠지는 상황은 없어야 한다.

성낙인(서울대 법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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