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호 칼럼] 하루키 선생에게 보내는 초대장 기사의 사진

“지난해 최고 문장은 ‘영혼의 길목’… 이웃나라 찾아 미래 위한 대화 나누는 게 어떨지”

저는 껄렁한 독자입니다. 선생의 책을 몇 권 읽었을 뿐입니다. 대신 충직합니다. 선생이 책에서 입이 마르게 칭찬한 ‘위대한 개츠비’를 기어이 다시 꺼내 읽었거든요. 전국의 우동집을 찾아다니며 쓴 글을 읽고 ‘우동 한 그릇’ 수준에서 벗어났으며, 달리기에 관한 책을 덮고는 부쩍 쇠약해진 제 몸을 돌아보기도 했지요. 돈 걱정 없이 세계 여행과 음식을 즐기는 선생의 삶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이런 소박한 독자가 벽두에 편지를 보내는 것은 지난 해에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길목’. 이 말은 2012년에 제가 발견한 감동의 문장이었습니다. 동북아시아 3국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9월말, 선생의 아사히신문 기고문은 글의 힘을 보여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이후 세 나라 사이의 갈등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지요.

다시금 한 대목을 음미합니다. “동아시아는 음악과 문학, 영화를 쉽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문화의 교환은 감정을 공유하는 동료애를 심어준다. 그것은 국경을 넘어 영혼이 오가는 길과 같은 것이다.” 민족주의의 폐해를 지적한 대목도 울림이 큽니다. “영토문제가 국민감정의 영역에 접어들면 싸구려 술의 취기와 닮는다. 목소리는 커지고, 행동은 폭력적으로 변하며, 논리는 단순화되어 반복된다. 시끌벅적하게 난리를 부린 뒤 날이 밝으면 두통만 남는다.”

물론 비판이 있습니다. 시장적 요소가 보인다거나, 일찌감치 입구(入歐)를 즐기면서 아시아적 요소를 소홀히 해온 행적을 일컫습니다. 신문글이 선생답지 않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맥주나 재즈 같은 소소한 일상에 관심을 갖는 게 자연스럽다는 거지요.

그러나 인화성 강한 소재를 이토록 세련된 언어로 다루기란 쉽지 않습니다. 진영논리에 매달리는 한국 작가나, 표현의 자유를 얻지 못한 중국 작가와 다른 부분이지요. 2011년 바르셀로나에서 행한 카탈루냐국제상 수상소감은 어땠나요.

“(동일본 대지진과 핵의 위험성을 경고한 뒤) 손상된 윤리규범의 재생을 시도하는 것은 말을 전문으로 하는 작가들의 일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같은 문제를 짊어지고, 같은 슬픔과 기쁨을 끌어안고 있는 세계시민입니다… 국경이나 문화를 뛰어넘는 정신적 공동체를 만들면 얼마나 멋질까요. 그런 공유가 없다면 소설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멋진 말을 서울에서 듣고자 초대장을 띄웁니다. 한국에서 선생의 책이 70여종 번역됐고, 1000만권 넘는 책이 팔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돌려 읽는 책의 속성을 감안하면 생활독서를 하는 한국인 대부분이 선생의 책을 읽었다는 결론입니다.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다는 명성을 감안해도 보기 드문 일이지요. 선생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대형서점에서 만우절 행사로 ‘하루키 방한’ 소식을 올릴 정도지요. 독자사인회 같은 이벤트를 싫어하는 선생의 취향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정치환경이 워낙 엄중하기에 발걸음을 청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한국과 일본, 중국은 근래 지도자를 교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 가는 중인데, 이 과정이 살얼음처럼 위태롭습니다. 오랜 역사를 공유하고도 아직까지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사랑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일본은 최초의 원폭 피해자, 중국은 굴욕의 근대사, 한국은 식민지배의 아픔을 내세우며 서로 들쑤시는 관계입니다. 몇 개의 섬을 둘러싼 갈등은 일촉즉발입니다.

이런 시기에 선생의 행보는 큰 의미를 갖습니다. 선생이 이웃나라를 돌며 이야기 나누다 보면 뜻 깊은 아시아적 가치와 비전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문화로 상처를 치유하면서 새로운 길을 열어나갈 수도 있겠지요. 위대한 작가의 행보는 폭신한 잔디밭이 아니라 초행의 험한 눈길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초청장의 문구를 이렇게 적습니다. “설국처럼 펼쳐지는 아시아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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