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걸기-한승주] 조금 느리게 기사의 사진

500만 관객을 눈앞에 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관객을 만났다. 전 세계 최초 개봉이다. 북미 개봉일은 지난해 12월 25일, 한국은 그보다 1주일 앞선 12월 19일이었다. 그날이 ‘빨간 날’인 대통령 선거일이었기 때문이다. 투표 후 관객이 대거 극장으로 몰릴 것을 예상한 영화 배급사가 “오케이, 그럼 한국에서 1주일 먼저 개봉하지”하고 결정한 것이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리암 니슨이 주연한 ‘테이큰 2’도, 다음달 개봉할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도 그렇다. ‘테이큰 2’ 때는 추석이 있었고, ‘다이하드’ 때는 설날이 있다. 지난해 4·11 총선 때는 ‘배틀쉽’이 미국보다 무려 한 달 먼저 개봉되기도 했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 한국만이 예외다. 그렇다면 왜? 우선 한국 영화시장이 세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한국영화를 본 관객은 1억1400여만명, 외화까지 합치면 약 2억명에 이른다. 갓난아기까지 포함한 전체 인구가 1년에 평균 4편의 영화를 봤다는 뜻. 이 정도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시간 나면 영화보기’가 습관이 됐다는 의미다.

한국은 세계 영화계의 ‘테스트 마켓(Test Market)’으로 통한다. 한국에서의 반응을 보고 이 영화가 아시아에서 혹은 세계적으로 될지 안 될지를 판단한다. 새 영화 홍보를 위해 홍콩이나 일본으로 가던 할리우드 스타들이 요즘은 한국으로 온다. 톰 크루즈가 무려 여섯 번이나 한국을 찾은 것도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씁쓸한 해석도 있다. 한국인은 성질이 급해 다른 곳에서 먼저 개봉하면 정식 상영 때까지 못 참는단다. 할리우드에서 개봉한 그날, 바로 불법 동영상이 올라온다. 어디서 어떻게 올라오는지 영화사도 모른다. 그 불법 동영상이 정식 개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남들보다 빨리 보고자 하는 욕구, 과시 욕망이 강하다는 것이다.

우리 삶이 빨라져간다는 것은 영화 개봉 요일에서도 느낄 수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새 영화를 만나는 요일은 매주 토요일이었다. 주5일제가 정착되면서 금요일 개봉이 늘어났다. 그러다가 요즘엔 목요일 개봉이 정착됐다. 하지만 수요일 밤이나 심지어 개봉일 전주 주말에 각종 이벤트와 유료 시사회 명목으로 앞당겨 영화를 볼 수도 있다.

빠름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느라 바쁜 거라면? 몸은 무지 바쁜데 마음은 공허하고 정신은 복잡하기만 하다면?

아이러니하게도 빨리 달려갈수록 시간의 지배자가 되지 못한다. 다가오는 시간에 조급하고, 늘 쫓기는 입장이 된다. 대신 내가 내 시간을 장악할 수 있게 되면 여유가 생긴다. 한숨 고르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과감히 빼자. 그러려면 남들과 똑같이 달려가지 않을 자세, 조금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최근 영화 ‘잭 리처’ 홍보차 방한한 크리스토퍼 매쿼리 감독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지 물었다. 스릴러물의 교본으로 불리는 ‘유주얼 서스펙트’(1995)가 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의 답변은 명쾌했다. “관객에게 보여줄 이야기를 쓰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라.” 그동안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남들이 안 될 거라고 말렸던 작품은 잘 됐고, 지레 관객의 입맛에 맞춰 쓴 건 다 안 됐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느리게, 대신 생각은 깊게 살아보면 어떨까.

한승주 문화생활부 차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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