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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이명희]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

[여의춘추-이명희]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 기사의 사진

“장삼이사도 지키는 법과 윤리를 어기는 사람은 고위공직자 될 생각하지 마라”

얼마 전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가 초·중·고교생 각각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44%는 “10억원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 정도 감옥에 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중학생은 28%, 초등학생은 12%였다. 한국투명성기구가 15∼30세 남녀 1031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최근 공개한 자료에서는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거짓말이나 불법을 통해서라도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한 비율이 40.1%에 달했다.

우리 자녀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돈, 돈’ 하는 세상이 돼 버렸을까. 1차적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정직하게 살아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라’는 선현들의 가르침은 도덕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가 돼버렸다. 아이들은 그래도 어렸을 때는 교사도 되고 싶고, 대통령도 꿈꾸고 다양한 미래를 그린다.

하지만 헬리콥터 부모들은 “내가 살아보니 말짱 꽝이더라.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도 돈 잘 버는 ‘사’자 들어가는 직업(물론 요즘은 밥벌이 못하는 의사·변호사가 수두룩하다지만)이 최고다”며 아이들의 인생 궤도를 수정한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진 가장 큰 책임은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우리 사회 풍토다. 정직하게 법과 질서를 지키면서 사는 사람이 손해 본다는 불편한 진실과, 반칙을 하더라도 돈만 있으면 감옥 가지 않는다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관행이 똬리를 틀고 있는 슬픈 현실에서 아이들은 일찌감치 돈이 최고라는 것을 깨달은 거다.

대한민국 사회지도층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보여줬다. 가족들과 식사를 하거나 콩나물 한 봉지를 살 때도 내 호주머니 돈은 절대 쓰지 말 것, 나랏돈으로 개인보험료 내고 MMF에 돈 넣어 굴릴 것. 간 큰 그들은 재테크의 달인이라 불릴 만하다. 해외출장엔 반드시 부인을 동반하고 관광코스를 끼워 넣자. 내 돈 들이지 않은 출장길에 님도 보고 관광도 했으니 시(時)테크의 달인 자격도 있다. 혹여 인사청문회에서 부인이 왜 공적인 출장에 동행했냐고 추궁당하면 ‘비서’ 대신이라고 둘러대면 된다.

장애를 극복하고 최연소 판사, 헌법재판소장에 올랐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자리를 눈앞에 두고 반전드라마를 보여준 국무총리 후보자는 한수 위다. 공교롭게도 두 아들 모두 미심쩍은 이유로 병역면제를 받았고, 1970∼80년대 사전개발정보를 이용해 서울과 수도권 여러 곳에 부동산투기를 해서 100억원대 부를 축적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는 평소 “최선의 법률가는 바르게 살고, 부지런히 일하다, 가난하게 죽는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는데 부동산 투기꾼의 민낯을 감추기 위한 위장술이었나보다. 하긴 대통령까지 나서서 힘 있고 돈 있으면 수십억원 뇌물을 받았더라도 죄다 풀어주는 세상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이들은 ‘그 당시 병역면제와 부동산투기는 은수저 물고 태어난 부유층들의 관행이었는데 왜 문제 삼느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느냐’고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뒤가 조금이라도 구리다면 고위 공직에 오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장삼이사도 다 지키는 법과 윤리를 지키지 않은 사람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공직자로서 자격이 없다. 그냥 졸부로 살면 된다.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이자 세계 2위 부호인 빌 게이츠는 최근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잘 먹고 잘 입을 만큼의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를 위해 더 이상 돈 쓸 데가 없다”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구를 만들고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게 훨씬 가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인 멜린다와 함께 설립한 자선재단을 통해 향후 6년간 18억 달러를 소아마비 퇴치에 사용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왜 빌 게이츠 같은 진정한 지도층이 없는지 안타깝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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