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박승 前 한은총재 “민생 해결, 가계부채 연착륙, 성장동력 구축을” 기사의 사진

박근혜정부의 경제과제 박승 前 한은총재에게 듣는다

경제성장률이 2년 연속 감소세다. 지난해는 2.0%로 전년보다 1.6% 포인트 줄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고 2년 만인 2010년 6.3%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재빠른 회복세를 보였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장기 저성장 국면 진입이 우려되는 가운데 오는 25일 새 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고 있다. 이에 경제학계의 원로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를 만나 현실 진단과 더불어 새 정부의 경제정책과제 등에 대해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14일 서울 평창동 박 전 총재 자택에서 이뤄졌다.

만난 사람=조용래 논설위원

올해 희수(喜壽)를 맞은 박 전 총재는 서재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모처럼 만에 추위가 조금 풀리기도 했고 햇볕이 좋아서 그랬다고 한다. 왼쪽 동공에 염증이 생겨 치료 중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미리 보내놓은 질문서에 빼곡하게 답변을 써놓은 메모는 꼼꼼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저성장기조가 시작된 것인가요.

“세계는 지금 장기 저성장시대에 들어섰어요.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전 20년 동안 세계경제가 신자유주의 하에서 고성장·저물가의 장기호황을 누리는 과정에서 낀 거품이 터진 것이고 이후 저성장기조가 계속되고 있지요. 미국은 2%대, 일본과 유럽은 0%대 성장이 좀 더 이어질 겁니다. 중국도 7%대 이하의 감속 성장이 예상됩니다. 한국은 저출산·고령화, 부동산경기 침체, 가계부채, 투자수요 소멸 등이 성장동력을 잠식하고 있어 경제 체력의 노화가 걱정됩니다.”

-선도 경제부문 활성화가 전 부문으로 확산된다는 ‘낙수효과’도 기대하기 어렵겠네요.

“최근 산업연구원(KIET)의 분석에 따르면 1975∼97년 연평균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증가율은 각각 8.1%, 8.2%로 큰 차이가 없지만 2000∼2010년의 연평균 기업소득증가율은 16.4%로 가계소득증가율 2.4%를 크게 웃돌았습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낙수효과는 사라졌습니다. 대기업 이익이 국내 재투자로 연계되지 않으면서 양극화, 빈부격차 문제가 두드러지게 된 셈이지요.”

-그럴수록 성장을 더욱 챙겨야 할 텐데요. 지난 18대 대선에서는 성장률 공약조차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장기불황에 빠진 일본을 닮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저금리, 저환율, 부동산 침체 등의 3저가 그렇고. 유일하게 다른 하나가 재정건전성이에요. 성장동력을 유지·개발하기 위해서는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면서 환율 방어 및 환투기 방지책, 저출산 대책, 투자수요 유발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투자수요 유발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매우 어려운 문제예요. 민간부문에서 투자유발이 안 된다면 공공투자, 공공사업과 같은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나 사회복지시설 투자 등을 늘려서 성장을 유도해야 합니다.”

-환투기 대책으로 토빈세가 많이 거론됩니다만.

“언제라도 제도를 도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경제민주화가 거론된 배경도 양극화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정치민주화가 권력을 국민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라면 경제민주화는 성장의 과실을 국민에게 나누는 것을 뜻해요. 이는 소득재분배를 말합니다. 기업소득과 가계소득이 극단적인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소득재분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해소하자면 재분배정책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소득재분배정책 강화는 결과적으로 대기업집단(재벌)의 역할에 대한 주문, 이른바 재벌정책과 관련이 있겠습니다.

“재벌의 소득 독점 해소 방법은 크게는 투자유도와 세금, 두 가지입니다. 이것을 선순환·악순환효과로 나눠서 생각해보지요. 투자를 통한 선순환은 성장·고용효과를 뜻하는데 앞으로도 재벌은 이 역할을 계속 맡아야 한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재벌 활용론이지요. 다만 악순환, 즉 재벌독점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소득재분배정책을 앞세워 세금으로 강제이전을 요구해야 합니다.”

-재벌을 비롯한 부유층에 과세를 늘려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조세부담률(담세율)은 약 2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26%보다 한참 낮은 수준입니다. 담세율에 사회보장비 등을 포함한 공적부담률을 보면 OECD 평균이 45%인데 한국은 26%입니다. GDP 대비 복지비 지출은 OECD 평균이 22%인데 한국은 10%로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담세율, 공적부담률 등을 중장기적으로 올리기 위해서는 전 국민이 부담을 더 져야 하겠지만 특히 재벌과 부유층에 과세를 늘려야 합니다. 기부를 생활화하고 있는 빌 게이츠 등 미국의 백만장자들은 고율의 과세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 이유를 자본주의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부유층·기득권층이 약한 자, 갖지 못한 자들을 위해 대변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지요.”

-박근혜정부가 유독 복지확대를 강조하는 것도 소득재분배 정책의 하나로군요.

“박근혜정부가 복지정책을 앞세우는 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경제성장과 복지 추구는 같은 수레의 양쪽 바퀴와 같아서 평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은 성장보다 복지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복지에 조금 더 중점을 둬야 합니다. 사실 생존권, 의료, 교육 등 세 가지 사회적 기본 수요는 정부의 소득재분배정책에 의해 사회화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이를 한꺼번에 달성하기는 어렵고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재원 때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재원과 관련해 차기 정부의 공약 가운데 가장 실현성이 적은 것은 소요자금의 60%를 예산절감 등을 통해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증세를 하지 않고 감추어진 기존 정부지출을 조율해서 추진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이는 공약을 포기하든지 재정건전성을 악화시키든지 둘 중 하나로 귀결될 것입니다. 복지증대를 바란다면 세금을 더 내야 마땅합니다.”

-재원마련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담세율을 현재의 20%보다 3% 포인트 올리면 연간 30조∼40조원이 늘어날 것이고 그 외 예산절감, 세원확대 등을 합해 50조원을 마련한다면 사회적 기본 수요를 충당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 우선 전 국민이 부담하는 부가가치세를 비롯해 소득세, 종합부동산세,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은 법인세 인상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1000조원에 이르는 가계부채도 문제인데요.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가계부채 해법은 자기책임 원칙이 지켜져야 하고 정부가 재정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차기 정부가 18조원의 국민행복기금을 마련해 저소득자 채무조정에 나서겠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해법은 못 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채무자에 대해서는 금리를 차별적으로 낮추고 상환기간을 연장하는 등의 방안은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시장기능을 존중하면서 시간을 두고 연착륙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가계부채문제는 사실상 부동산 침체와 맞물려 있는데요.

“부동산시장은 한국경제의 뇌관과도 같습니다. 부동산 침체는 수급문제 이전에 인구감소, 고가로 인한 매입 수요 단절, 젊은 층의 주택에 대한 인식 변화 등에 따른 구조적인 요인이 강해서 쉽게 회복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부동산 침체는 세계적인 추세인데 미국, 일본 등이 지난 5년 새 30% 이상 값이 폭락한 데 비해 한국은 아직 보합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지금의 부동산 침체는 정상화 과정이기 때문에 이 역시 시간을 두고 연착륙을 유도해야 합니다.”

-새 정부가 우선적으로 다뤄야 할 경제정책과제는 무엇입니까.

“박근혜정부가 직면하게 될 국내외 경제환경은 대단히 어렵다고 봅니다. 세계적인 저성장기조와 복지수요 팽창 등으로 급격한 체력 노화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과제는 우선 양극화로 인한 민생문제 해결, 재정건전성 유지 및 가계부채 연착륙 노력, 저출산대책과 함께 적정 환율 유지를 통한 성장동력 구축 등으로 봅니다.”

-책임총리제, 경제부총리제 도입이 도움이 될까요.

“특히 경제부총리를 세운 것은 잘한 대응이라고 봅니다. 다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처 개편이 벌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최근 일본 정부가 무제한적인 양적완화를 하면서 엔저(低)를 유도하는 경제정책, 즉 아베노믹스를 펼치고 있는데요.

“아베노믹스는 일본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일리는 있어요. 현재까지는 효과를 보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지속적으로 정책효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간의 엔고는 일본의 과소 지출과 과대 저축이 누적되면서 나타난 과도한 국제수지흑자 때문에 빚어진 것인데 문제의 핵심은 건드리지 않고 양적완화만을 앞세워 엔저를 유도한다면 효과는 오래 가지 못할 테니까요.”

-한국은 되레 원고(高) 때문에 수출이 줄어드는 등 애로가 적지 않습니다.

“원고 기조는 피할 수 없겠지만 현재 원·달러 환율 1080원 전후 정도는 중립수준이라고 봅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원·달러 환율이 1000원을 위협하는 수준이라면 토빈세 도입도 적극 고려해야겠지요.”

박 전 총재는 2002년 한은 총재에 취임하자마자 화폐제도개혁추진팀을 구성해 1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고 신권 교체, 고액권 발행, 1000원을 1원으로 하는 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변경)을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찬반 논란이 거셌지만 결국 노무현 정부는 5만원권만을 새로 발행하는 선으로 무마했다. 이 점을 박 전 총재는 회고록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2010)에서 크게 아쉬워한 바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해서는 여전히 같은 생각인가요.

“꼭 필요해요. 정부가 나서지 않으니 이미 일반 커피숍 같은 데서는 4000원을 4.0으로 표기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요. 일각에서는 반대 이유로 화폐단위 변경으로 인한 불안, 우수리 절상에 따른 물가상승 우려 등을 거론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금방 시정될 수 있는 문제라고 봐요. OECD국가 중 1달러가 1000원대인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한국은 무역에서는 선진국이지만 1인당 GDP로 보면 중진국, 화폐제도는 후진국입니다. 박근혜정부가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한다면 역사에 오래 기억될 겁니다.”

박 전 총재는 인터뷰 내내 거침이 없었다. 특히 의욕적으로 추진했지만 관철되지 못했던 리디노미네이션에 애착이 큰 듯 보였다. 때마침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그날 기준금리를 연 2.75%로 4개월째 동결했다. 이에 대해 박 전 총재는 “기준금리는 좀 더 내릴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올 경제환경은 낙관하기 어렵지만 한국은 어려울 때일수록 극복하는 힘을 발휘해왔던 만큼 모두가 힘을 모아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덕담을 잊지 않았다.

■ 박승 前 한은 총재는

경제학을 가장 알기 쉽게 가르치는 교수, 학계와 정부를 넘나들며 활약해 온 경제학계의 원로, 농민들의 땀내 농촌의 흙내 그리고 푸른 벼 냄새를 잊을 수 없어 아호를 청도(靑稻)라고 지은 이, 영원한 한은 맨 등 그를 삶을 상징하는 이름은 적지 않다. 특히 그의 선심후물(先心後物)이란 좌우명은 퍽 인상적이다. 선심후물에 대해 그는 “물질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특히 공인이라면 근면, 성실, 지식탐구, 봉사 등 정신적인 측면은 남보다 앞서 실천하되 재물에 관해서는 남보다 한 발 뒤로 물러서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남겨주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모교인 김제 백석초등학교에 장학금을 보내고 도서관을 기증한 것도 선심후물의 실천이었다. “일부에서 청문회를 지나친 허들이라고 말하는 모양이나 고위 공직자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사회의 앞날이 밝다는 증거”라며 청문회를 높이 평가했다. ◇1936년 전북 김제 출생 ◇1961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한국은행 입행 ◇1974년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1976년 중앙대 교수 ◇1986년 한은 금융통화운영위원 ◇1988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건설부장관 ◇1999년 한국경제학회장 ◇2001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2002년 한은 총재

choy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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