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시대가 요청하는 리더십 발휘를 기사의 사진

“대화가 안 되는 사람과도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해야 비로소 ‘대화주의자’가 될 수 있다”

“나는 원래 대화주의자다. 나는 대화가 될 만한 사람과는 누구보다 열심히 (대화)하려고 했던 사람이지만 대화가 안 되는 사람하고 해봐야….”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 열흘 전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처리되지 못하고 있을 때 국회를 방문한 것을 예로 들기도 했다. 하긴 대통령이 국회에까지 찾아가서 의안처리 협조를 요청했던 경우는 달리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대화주의자’ 아니냐는 뜻이겠는데, 그렇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대화란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각자의 의견을 기탄없이 말하고 듣는 과정을 말한다.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위상이 다를 경우, 한쪽의 말은 지시 요구 명령 훈계 따위, 다른 쪽의 말은 반박 거절 항변 청원 등이 된다. 쌍방향성을 가진 말의 흐름이면 대화이지만, 일방향성을 가진 말의 흐름은 선언에 불과하다. 이렇게 전제하고 본다면 이 전 대통령은 아무래도 ‘대화주의자’는 아니다. ‘대화가 안 되는 사람’과의 소통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할 때에야 비로소 ‘대화주의자’일 수가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는 어떨까? 이미 일부 언론에서는 ‘불통’으로 이미지 지었다. 이 전 대통령보다 대화기피가 더 심하다는 말이 된다. 물론 박 대통령도 지속적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상대다. “아니요”라고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를 꺼린다면 대화기피증 혹은 소통장애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국정 최고책임자다. 그에게는 임기동안 국정을 이끌어갈 책임과 함께 권한도 부여돼 있다. 따라서 정부조직개편과 정부 요직 인사에 대한 대통령의 뜻과 권한은 존중돼야 한다. 이 점은 분명하다. 다만 그게 절대적 권한일 수는 없다. 이 점에서 권위적 리더십과 민주적 리더십은 확연히 구분된다. 민주적 리더십은 팔로어와의 지속적인 소통 속에서 행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 취임 일주일이 지나도록 정부조직이 확정되지 않고 국무총리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의 장관도 임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참으로 딱하고 답답하다. 국회 탓, 야당 탓을 할 문제가 아니다. 야당의 협조 없이는 국회가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게 된 상황을 박 대통령은 생각해봐야 한다. 이른바 ‘국회선진화법’(국회법 개정안)은 박 당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의 결단에 힘입어 본회의를 통과할 수가 있었다. 이로써 국회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수결 원칙’은 사실상 배제되고 오직 ‘여야의 합의’라는 수단만이 남았다.

그게 국회선진화의 길이라고 믿었다면 ‘합의’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합의’의 기술을 발휘할 일이다. ‘원안 통과’는 이제 사전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정부조직개편은 법률사항으로 국회가 결정권을 갖는다. 여야가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게 그 때문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이 문제와 관련해서 3일 여야대표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대통령과 여야대표가 만나서 고리를 풀자는 뜻이었겠지만 이는 사리에 맞지 않는다. 여당의 협상대표가 못 푼 문제를 대통령이 풀겠다고 하는 것은 여당의 입지를 청와대가 뺏겠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 점에선 오히려 회동 무산이 다행스럽다고 하겠다.

대통령은 구중심처에 남면(南面)하고 앉아 있는 절대자가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 속에서 서로 소통하면서 ‘희망의 나라’를 향해 함께 가는 지도자다. 진두에 서서 “나를 따르라”고 했던 1960·70년대의 리더십은 잊어야 한다. 2010년대의 국민이 원하는 리더십은 그때와 확연히 다르다.

민주정치는 ‘차선’을 지향하는 정치라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최선의 대안으로서 구상했던 정부조직이 그대로 구현되면야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바람이다. 대화와 협상의 정치는 상호 양보를 전제로 하는 만큼 차선에 만족해야 한다. 그 때문에 정부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이는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민주 비용’이다.

논설고문(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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