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걸기-한승주] 사라지는 대학로 소극장 기사의 사진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없던 1990년대 초, 서울 대학로는 지금보다 활기가 넘쳤다.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를 했다. 무명의 화가도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모여들었다. 그곳은 또 연극의 거리였다. 많은 청춘들이 소극장을 찾았다. 요즘 ‘주말에 어떤 영화를 볼까’ 하듯이 그때는 대학로에서 데이트를 하는 연인이 많았다.

대학로 대표극장인 연우무대에서는 시인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실험극장에서는 영국 작가 피터 쉐퍼의 ‘에쿠우스’가 올려졌다. 다른 극장의 ‘리타 길들이기’와 ‘한밤의 북소리’도 인기였다. 의자가 아닌 바닥에 앉아야 하는 소극장에는 엉덩이 하나 붙일 틈도 없이 빼곡하게 관객이 들어찼다.

가객 고(故) 김광석이 출근하듯 드나들었던 학전블루 소극장. 그는 이곳에서 무려 1000회나 공연을 하며 관객을 만났다. 학전그린 소극장에선 1996년부터 2008년까지 12년 동안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올려졌다. 대학로는 연극뿐 아니라 뮤지컬, 라이브 공연까지 만날 수 있는 예술의 거리였다. 그래서 대학로는 젊음 또는 문화라는 단어와 동격처럼 느껴졌고, 그곳에 가면 뭔가 좋은 일이 펼쳐질 것 같았다.

요즘 대학로는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느낌이다. 공연장은 여전히 많은데 순수연극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 도착하면 연극을 홍보하는 전단지가 쏟아진다. 대부분 웃기거나 선정적인 작품이다. 아예 내놓고 ‘19금’을 표방한 어떤 연극은 여배우가 올 누드로 나온다고 선전한다. 무작정 웃겨보려는 연극도 많지만 정말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작품성 있다고 소문난 연극을 찾아가보면 의외로 빈 자리가 많다. 이래서 장사가 될까 걱정이 될 정도다.

대학로의 상징적 공간인 학전그린이 10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건물주가 중소기업에 극장을 팔았고 새 주인은 극장을 허물고 기업의 사옥을 재건축할 계획이다. 학전그린은 공연계의 대표 연출가인 김민기가 대표로 있는 극장이다. 김윤석 설경구 황정민 등 한국영화계를 짊어지고 가는 배우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5000여회 공연에 78만명이 넘는 관객이 다녀갔다. 하지만 이런 명성도 폐관을 막지 못했다.

학전그린만의 상황이 아니라는 게 더 문제다. 소극장은 비싼 임대료 때문에 수익을 내기 어렵고, 공연단체는 극장 대관료가 비싸 공연을 해도 적자다. 배우 김갑수가 운영하던 배우세상소극장은 지난해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았다. 배우 겸 연출가 고(故) 박광정이 꾸렸던 극단 파크의 거점이었던 정보소극장은 운영주가 바뀌었다. 1987년 개관한 대학로극장도 퇴출 압박을 받고 있다. 순수연극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 속속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가 지금의 전성기를 맞기까지는 독립영화나 다양성 영화의 탄탄한 뿌리가 있었다. 공연계도 마찬가지다. 요즘 잘나가는 대형 뮤지컬이나 상업연극의 바탕에는 순수연극이 있다. 대학로 소극장은 바로 순수예술의 창작 스튜디오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정부나 공공단체가 대학로 소극장 살리기에 나서면 어떨까. 기초예술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창작극이나 실험극 등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급선무이다. 소극장의 경상비 정도를 국가가 지원해 공연단체의 대관료 부담을 낮춰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소극장이 사라지는 것은 단지 한 극장의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관객들의 추억까지 극장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승주 문화생활부 차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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