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내 영혼의 책갈피] (37)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 기사의 사진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 (고든 맥도널드, 홍병룡 옮김, VIP)

이 책은 몇 줄의 시와 함께 시작하고 또 깊어진다. 시인 에드 시스맨 (Ed Sissman)이 썼다는 ‘시(時)’이다

‘사십이 넘은 남자들/ 한밤중에 일어나서/ 도시의 불빛을 쳐다보고는/ 인생이 왜 그리도 긴지 의아해하고/ 어디서 길을 잘못 들어섰는지 생각한다.’

길을 잃고 깜깜한 낭떠러지 앞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뗄 수 없었던 저자 자신의 회상이 곁들여진다. 온각 미디어와 관계망들을 통해 그의 끔찍하고도 바보스러웠던 실패가 터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저자는 소망의 불빛이 모두 꺼져버린 것을 느낀다.

미국 작가 레오나드 마이클스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는 세 번에 걸친 이혼과 자식들과의 이별, 그리고 스스로 저지른 악행과 죄의 목록들을 떠올리며 “어떤 낯선 자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썼다. “나라면 결코 행하지 않았을, 결코 말하지 않았을 것들을 말하고 행했다. 나는 그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다”고 고백하면서 참담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 남자는 바로 나”라고.

이렇게 소망의 불빛을 잃어버린 채 낙담과 좌절, 실의와 절망, 그리고 무기력과 공허에 빠진 사람들에게 저자는 ‘중간 궤도 수정’ 이라는 긴급 처방을 내놓는다. 비행기가 항로를 이탈했을 때 관제탑으로부터 주어지는 명령이다. 그는 성경적 삶을 ‘떠나라, 따르라, 뻗어나가라’는 세 단어로 압축하면서 중간 궤도 수정은 바로 이 세 가지 계기판의 명령을 따라 가는 방향을 바꾸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궤도 수정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우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죄 된 것에 습관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자신을 제어해야 하는데 이 작업이 실로 악전고투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다시 절규와 같은 테니슨의 시 한 줄이 나온다.

‘오, 내 속에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도록/ 현재의 나, 이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를.’

저자는 인생의 항로, 즉 나름대로 창조주의 목적성을 따르고 그곳을 향해가다가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궤도 수정을 우리가 마음 혹은 영혼이라고 부르는, 내부로부터 시작하여 외부로 확산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이때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회심이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도하에서만 가능하다고 못 박는다. 내 주도로 했던 것들, 예컨대 내 판단과 직관과 충동으로 내려진 결론들이 결국 나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갔기 때문에 궤도 수정에는 하나님의 관제탑으로부터 내려지는 명령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떠나라, 따르라, 뻗어나가라”의 명령인 것이다.

사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캄캄한 숲에서 길을 잃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불빛 외에는 소망이 없는 상태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캄캄한 숲’이 “스스로 만든 것이든 상황의 부산물이든” 여기서 가능한 유일한 해결책은 ‘궤도수정’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의 나침반’을 따라 그 어두운 숲을 빠져나가는 일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역설한다.

이 책에는 중간 궤도 수정을 이루어낸 모델들이 나온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바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 곁의 보통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허다한 ‘어두운 숲에 빠진’ 사람들과 그 숲으로부터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의 명저인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의 서문처럼 ‘어두운 숲’에서 빠져나오는 첫 단계는 한결같이 내면세계의 정비로부터 시작된다. 캄캄한 숲보다 더 어둡고 헝클어져 있는 마음과 영혼의 수리가 이루어지면 그곳으로부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가 숲을 비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에 다시 그는 궤도 수정을 위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연 사람들은 변화할 수 있는가, 더 깊고 역동적이며 지금과는 다른 인물이 될 수 있는가, 바람직하지 않은 삶의 패턴을 따라 너무도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리하여 그들이 되고 싶었던 존재, 하나님이 기대하신 삶과는 너무도 멀리 와 있는 캄캄한 숲 속의 삶이 변화를 따라 궤도 수정을 할 수 있기는 한 것인가에 대해 다시 묻고 “그렇다! 가능하다”고 말한다. 온갖 비관론을 뚫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희미한 빛 한 줄기를 보기만 한다면 그 일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듣고 보며 걷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다.

(서울대 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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