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문화는 어떤 조건에서 융성하는가 기사의 사진

“억압의 시대가 가고 창의성이 만개하고 있다. 그 방향을 읽는 눈이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꼭 한 달 전 취임사에서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을 국정의 3대 키워드로 제시했다. 박 대통령의 취임사가 역대 대통령들과 차별성을 갖는 것은 “사회 곳곳에 문화의 가치가 스며들게 하여 국민 모두가 문화가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 문화 강조에 있었다. ‘미래창조’가 박 대통령 국정철학의 최우선 순위라면 ‘문화’는 그 구체성이라는 점에서 박 대통령 취임사의 핵심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새 정부에 문화의 봄은 오지 않고 있다. 대통령직인수위 때부터 임명된 고위직 100여 명 가운데 벌써 6명이 중도하차했다. 청와대 비서관까지 합치면 두자리 수에 이른다. 숫자도 숫자지만 면면을 보면 기가 막힌다. 김용준 총리 지명자,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내정자, 김학의 법무부 차관. 우리 사회가 배출해 낼 수 있는 최고의 인물 군이다.

이 기록적인 낙마율은 ‘문화가 있는 삶’을 위협하는 최대의 변인(變因)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화라는 ‘소통’과 낙마라는 ‘비소통’의 괄목할 만한 갭이 바로 새 정부 시련의 폭이다. 이를 줄이지 못하면 어려움은 풀리지 않는다는 방정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문화가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점검이 다시금 필요하다.

우리사회에는 활발한 여가나 취미활동, 공연과 전시 관람, 기호에 맞는 식당 순례, 명품 장만 같은 문화 향수(享受)가 보편화되고 있다. 이런 한편으로 자생적·역동적인 문화가 폭발하는 ‘한류’라는 특징적인 문화현상을 창출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문화융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세심한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소프트파워를 바탕으로 현재의 차고 넘치는 방종을 절제로, 독선을 겸양으로, 억압을 자유로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치체계가 분명하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오늘날의 문화융성은 국민교육헌장의 암송, 국기 하강식 때의 부동자세, 반공과 방첩의 날 설정과 같은 일사불란함이나 형식위주의 문화코드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또한 부(富)를 바탕으로 한 것이거나 특정계층에서 은연중 과시하는 배타성과도 다른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박 대통령이 보여주는 스타일에는 억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어렵다. 전문가 위주의 인사는 대탕평과 어긋나고, 지역과 학교의 쏠림은 소통과 배치된다.

전문가란 전문적인 지식을 이용하여 배타적으로 이익을 획득하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그 전문지식을 독점적으로 이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들에 대한 지나친 쏠림 현상은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건전한 아마추어 정신을 경시하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과거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우리사회에는 창의력이 폭죽처럼 터지고 있다. 21세기 들어 이렇게 탄력적인 문화가 나타나고 있는 곳은 한국 외에는 달리 없다. 이때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고, 잘못된 것은 고쳐지는 쪽으로 가야 한다. 지난 21일 헌법재판소는 유신시대의 대통령긴급조치 제1·2·9호에 대해 현원(現員) 재판관 8인의 전원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07년 1월 진실화해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 589건을 분석한 것을 보면 음주 및 대화 도중 대통령과 유신을 비판한 케이스가 전체의 48%를 차지하며 유신독재에 항거한 학생운동은 32%, 반유신 재야운동이 14.5%인 것으로 나타났다. 간첩행위는 2건뿐이었다.

이렇듯 독재정권의 강압 앞에서 당대 사법 전문가들의 양심은 작동하지 않았다. 지금 이런 비문화가 고쳐지고 있는 중이다. 문화는 결국 자유롭고 인간의 기본질서에 부합하는 쪽으로 진행한다. 잘못된 문화를 계속 답습하려 하거나 전문가의 영역은 다르다는 식으로 오도할 때 문화융성은 멀어진다. 문화는 겸양과 소통에서 피어난다.

편집인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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