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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3. 기독교의 하나님:삼위일체] ④ 삼위일체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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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에서 ‘하나’의 의미는 숫자가 아니라

세 위격이 상호 내재-연합된 ‘공동체적 하나님’


오늘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표현에 대해 보려 한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서술하는 신비이며, 인간의 언어와 사고의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인간의 상식적인 사고로는 잘못된 이해에 빠지기 쉽고, 오히려 바른 이해가 어렵다. 오늘이 삼위일체론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삼위일체론의 두 방법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내적인 관계에 접근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기술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이해한 삼위일체에 대한 이론을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른다. 삼위 하나님을 반드시 ‘존재론’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중요하다. 하지만 내재적 삼위일체는 삼위의 내적인 관계이며, 삼위가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인식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진다. 또 삼위일체를 존재론적으로만 논하면 사변적이 되어 공허해진다.

다른 하나는 삼위가 역사 속에서 행하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인식하는 방법이다. 성경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행위에 대한 풍부한 기록이 있다. 이렇게 삼위의 역사 섭리를 통해 이해하는 방법을 ‘경세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른다. 성경은 모호하게 삼위에 대해 말하지 않고 구체적 행위에 근거해서 말한다. 하나님의 활동과 역사는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인식된다. 이 점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장점이다. 그러나 경세적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존재’에 근거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험되는 어떤 ‘기능’이나 ‘현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접근할 때는 경세적 삼위일체로 시작하고, 그에 근거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함께 이해하는 방법이 좋다. 하나님의 활동은 반드시 그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경륜과 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칼 라너는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경세적 삼위일체론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일체는 숫자가 아니라 공동체

이제 삼위일체에 대한 적절한 개념과 표현을 보자.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숫자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아주 나쁜 접근방법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이 숫자적으로 ‘하나’의 본질이나 신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 삼위일체론에서 한 분 하나님과 세 인격체(person)라는 표현을 할 때 한 하나님의 ‘하나’와 세 인격체의 ‘셋’을 같은 평면에서 다루면 안 된다. 즉 3과 1을 동일 평면에서 이해하면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되는 모순에 빠진다.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3=1’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삼위와 일체를 숫자로 이해하면 삼위일체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모순적 교리가 된다.

성부, 성자, 성령을 모두 신성이라고 인정한다면 결국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하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관건이다. ‘하나’는 숫자가 아니고 세 위격이 함께 연합해서 가지는 공동체성을 의미한다. ‘일체’는 세 위격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상호 내재해 있는 ‘연합이며, 삼위의 의지와 구속 사업이 서로 상반되지 않고 통일을 이루는 ‘공동체’를 뜻한다.

최근에 삼위의 공동체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를 사용한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 내재적, 순환적, 침투적이라는 의미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통재(相互通在)를 통해서 일체되시는 ‘공동체적 하나님’을 형성하고 있다.

이 통일성 때문에 성부는 성자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령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성자는 성부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령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성령은 성부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자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페리코레시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계신 것이 아니고 상호 침투하셔서 성부는 성자 안에, 성자는 성부 안에,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 거하시는 공동체라는 의미다.

삼위는 함께 역사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성부, 성자, 성령이 가지는 고유한 속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부를 전능, 성자를 전지, 성령을 전선이라고 표현했다. 성부를 태초의 근원, 성자를 지혜, 성령을 덕성으로 부르는 것도 유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 삼위의 속성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다. 삼위가 자신만의 고유한 속성을 가지면 결국은 삼위의 완전한 일치가 깨지고 삼위가 분리된다.

삼위의 역할과 경세도 마찬가지다. 만약 성부가 천지창조의 행위를 하고, 성자는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음으로 구원사업을 하고, 성령은 성화의 영으로 피조세계에 임한다고 생각하면 삼위는 각자 고유한 영역을 가지게 되고 결국 삼위의 공동체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삼위가 함께 활동하신다는 표현이 더 좋다고 본다. 예를 들면 천지창조는 성부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함께 하신 사건으로 본다. 또 십자가의 구원도 예수님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행위이고, 성령님의 성화도 성령 홀로가 아니라 삼위의 역사로 본다.

성경이 어떤 사건을 때로는 성부, 때로는 성자, 때로는 성령의 행위로 표현하지만 그 의미는 삼위가 함께 역사하신 것으로 보면 되겠다. 즉 십자가 사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통해’ 행하신 구속사업인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삼위일체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 삼위의 온전한 사귐 안에서 인간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기도 하고, 삼위일체를 실천적이고 해방적 교리로 해석하기도 하며, 삼위의 섭리 형태를 생태계와 우주를 포함하는 사상으로 발전시키는 모티브로 삼기도 한다. 삼위 하나님에게 다가가려는 노력 속에서 온 피조세계가 하나님 안에 안길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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