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칼럼] ‘현대판 신분’에서 능력으로 기사의 사진

“중·고령자 정년연장도 나이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차별시정 관점에서 접근해야”

우리나라에서 생애 주된 일터, 즉 근속기간이 가장 긴 직장을 일찍 그만두면 어떻게 될까. 외환위기 이후 숱한 조기 퇴직자들이 겪은 시행착오와 소득의 급전직하를 보고 깨달은 직장인들은 이제 명예퇴직을 예전처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노후 소득 대책이 없는 위기의 노년을 앞두고 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2006년 44.9%에서 2011년 48.8%까지 높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노인 빈곤율은 13.5%다. 사정이 이러니 주된 직장에서 최대한 버텨야 한다.

기업 정년을 60세 미만으로 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이 어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재계는 국회 상임위를 통과한 ‘정년연장법안’에 대해 그제까지도 이런저런 구실을 들어 법안처리를 유예해 줄 것을 요청해 날선 공방이 펼쳐지기도 했다. 법 개정안이 확정됨에 따라 2016년, 또는 2017년부터 사업주가 직원을 60세가 되기 전에 내보내면 부당해고로 간주돼 처벌을 받을 수도 있게 됐다.

평균 53세까지 낮아진 조기 퇴직현상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지난해 말 한국노동연구원이 펴낸 ‘기업의 정년실태와 퇴직관리’ 보고서에 따르면 고도성장기에 기업들은 급증하는 인력수요에 부응하려고 장기근속을 유도하면서 연공서열과 연공급 중심의 인사관리를 고착화시켰다. 그 대신 구성원들의 동기부여 수준을 높이고 경쟁을 부추길 필요에 따라 공식적 직급정년제 혹은 비공식적으로 ‘업 오어 아웃(up or out, 승진 못하면 퇴출)’ 관행을 정착시켰다.

조기퇴직제도는 비정상적 인력구조를 더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노조가 있는 대기업에서 생산직은 고령화하고, 사무관리직이나 영업직에서는 리더급 중간계층이 부족해졌다. 또한 ‘생존자 증후군’이 생겨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지게 됐다. 임금피크제도 일률적 임금삭감에 대한 노조의 반감 때문에 장기적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으로 지적된다.

중·고령자의 정년 연장 문제도 근본적으로는 차별시정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즉 연령, 성별, 학력, 출신지역, 인종 등 인적 요소보다 능력을 중시하자는 것이다. 사람의 업적과 능력(잠재력)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역량은 우리 사회가 가장 취약한 대목이다. 따라서 인적 요소에 고용형태(비정규직여부)까지 더하면 ‘현대판 신분’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나라는 아직 ‘간판’이 통용되는 사회다. 근대사회로의 진보가 ‘신분에서 계약으로’를 표방했듯이 사람의 판단기준을 ‘신분에서 능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직무중심의 인사관리와 직무급을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그러나 국내 기업의 경우 직무분석이 안 돼 있고, 시장 직무임금이 형성되지 않았다. 기존 연공급제와의 충돌, 일괄채용 후 배치관행, 경쟁기업 간 직무급의 비교 기피현상 등으로 노사 모두 직무급 도입을 꺼리는 게 현실이다. 독립적 업무가 가능한 직무, 전문성이 강해 보상 결정이 어려운 직무부터 직무 중심의 인적자원관리와 재고용제도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경력 모형을 지금의 수직적 사다리 모형에서 다양한 전문가 제도를 병행하는 다중경력 경로로 만들 필요도 있다.

고령자 멘토링 제도, 고령친화적 일·가정 양립제도의 도입 등을 통해 직장생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중요하다. 중·고령 근로자 본인이 근로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든지 근로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휴가를 늘려 2∼3년 전부터 은퇴를 준비시키는 방법도 있다.

지금 조기퇴직에 내몰리는 근로자는 주로 대기업의 관리·사무직이다. 중소기업들은 인력난 때문에 정년퇴직 제도가 없거나 있더라도 큰 의미가 없는 곳이 많다. 대기업이 지금은 독과점적 지위 덕분에 고령자와 여성을 대체로 배제하고서도 버틸 수 있지만, 핵심노동인구를 포함한 노동가능인구가 급감하는 시대에도 적응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인사관리의 변화를 거부하는 기업들은 ‘점차 뜨거워지는 솥단지 안의 개구리’가 될 수도 있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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