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차정식] 세속을 깊이 알자 기사의 사진

전주는 금주 내내 축제 분위기로 들썩거린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올해로 14회를 맞았다. 이번에도 감독과 배우들의 노고가 담긴 170여 편의 예술작품들이 내 일상의 리듬을 파동 치게 만든다. 하루에 평균 두 작품을 목표로 매일같이 영화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온라인매체로 현장 중계하다시피 하고 있다.

지자체 축제에 미력의 에너지나마 보태는 사유는 간단하다. 일반 오락영화와 달리 이들 작품에는 인간의 다양한 삶이 매우 리얼하게 담겨 있다. 세속의 사람살이에 스민 복잡한 사연의 층층면면도 작품의 행간에서 예사롭지 않게 반짝인다. 거기서 압축되는 인간적 세속의 풍경은 매우 적나라하거나 애매모호하다. 또는 극히 신비롭거나 아득하다. 물론 누추하고 애통할 만한 사연도 많다.

이런 영화의 세계에 몰두해 깊이 유영하다 보면 인간의 삶과 죽음, 역사의 다면적인 지층을 쉽게 단순화하기 어렵다는 깨우침이 생긴다. 21세기의 영화적 주제와 쟁점들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들이 변주되기도 하지만 특별히 낯선 타자와의 부대낌과 기묘한 인연, 연대와 소통이란 시대적 과제가 부각된다. 왕따, 청소년 임신, 빈부 격차, 천안함 사건 같은 정치사회적 소재를 다룬 작품도 여전하고 실험적 형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치밀한 연출과 연기의 몸부림도 충일하다.

삶의 복잡성에 민감해져야

그리스도인을 포함해 종교인들은 진리가 단순하다고 말한다. 진리가 단순한 만큼 인간세계도 단순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간사의 잡다한 현상들은 물론 우주와 억조창생의 삶 가운데 감추어진 이치들 역시 쉽게 단순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이 교조적 진리로 압축되고 나아가 더 간단한 핵심 원리와 실천 강령으로 단순화된다.

그 가운데 이 세상은 너무 쉽게 재단되고 간편하게 인식된다. 그것이 인간사의 세세한 골짜기를 온몸으로 통과해 깨친 복잡성 이후의 소박함이 아닐 경우, 단순한 진리는 경박해지기 일쑤이다. 이런 인식의 틀 속에 세속은 한없이 만만해지거나 소름 끼치는 정죄와 매도, 또는 회피의 대상이 된다.

특히 자신의 안온한 정서적 인큐베이터 속에서 고분고분한 모범생으로 살아온 사람들일수록 세속의 깊이와 치열하게 대결하려는 ‘존재에의 용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건전한 ‘세속적 트임’도 빈약하다. 자신의 주체적 언어로 진창 같은 세속을 빡빡 기면서 더 바람직한 세상을 꿈꾸고 해석하며 전망하는 도저한 모험에도 굼뜨다. 그러니 자기동일성의 반복적 자맥질로 맴도는 신앙적 동력 또한 안이한 자기정당화의 몸짓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문화의 계시적 징조 파악하길

하나님은 세속의 인간을 깊이 알기 위해, 인간을 넓게 품기 위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것이 성육신의 교리다. 또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과감하게 남루한 인간들의 폭력적 손아귀에 맡기셨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인간이 죽음 앞에 얼마나 두려워 떠는지, 그 까마득한 공포의 심연을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비로소 우리 구원의 ‘저자’가 되셨다.

구약시대의 에스겔 같은 예언자는 당시 첨단 미디어를 총동원해 자신의 몸으로 공연하듯 예언했다. 세속사회 한 복판으로 제 운명을 던진 그에게 예언은 진지한 심연으로서의 삶이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시대와 고투한 그의 삶 자체가 곧 징조였고 계시였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선입견과 기득권의 인큐베이터 속에서 세상을 너무 무서워하거나 수박 겉핥기식으로 가소롭게 보는 것은 아닌가.

특히 신앙인의 입장에서 세상의 예술과 문화가 던지는 계시적 징조는 무엇인지, 인간의 욕망과 내면이 그 외곽의 두터운 체제와 함께 어떻게 진화하는지에 대해 ‘영혼’의 구원을 외치는 이들은 더욱더 진중하고 민감해져야 할 것이다.

차정식(한일장신대 교수·신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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