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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발견] (23) 옛날식 간판

[디자인의 발견] (23) 옛날식 간판 기사의 사진

몇 년 전 지자체들이 앞 다투어 간판 개선 사업을 벌였다. 원색의 큼직한 간판들이 사라져 눈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으나 획일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후에도 간판 교체가 엄청나게 이뤄졌다. 은행이 통폐합되고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창업과 폐업을 반복하는 와중에 동네 풍경은 변화무쌍했다.

어디 이뿐인가. 개발을 하느라고 동네 전체가 바뀐 곳도 있고 갖가지 프랜차이즈와 대기업 매장이 골목까지 밀어닥쳤다. 이 격랑을 다행히 피해간 동네의 간판들을 보면 전쟁터의 생존자마냥 위대해 보인다. 그중에서 특히 애착이 가는 것은 수공업 제작 방식으로 만든 간판이다. 아크릴 간판집이라고 불렸던 동네 간판집에서 아크릴 칼과 실톱으로 만들어낸 글자의 느낌은 컴퓨터에서 제공된 폰트를 불러서 출력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아크릴을 잘라내어 글자를 만들기 때문에 직선과 원으로 짜맞추어야 했다. 특정한 서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칼자루 쥔 사람의 솜씨와 작업 효율에 맞게 탄생한 간판이었으나 눈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오늘의 간판은 얼마나 다를까. 의욕적인 타이포그래피, 감성을 자극하는 캘리그래피 작업은 원조 할머니의 모습을 내세운 간판보다는 분명히 한 수 위다. 하지만 기술 수준이 높아지고 선택이 다양해진 만큼 혼란스럽기 일쑤다. 수십년 모진 변화 속에서 살아남은 옛날식 간판을 보면 단순한 기술의 제약조건이 간결한 시각 환경을 만든다는 역설적인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김상규(서울과학기술대 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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