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칼럼] ‘국민행복시대’라는 허구 기사의 사진

“행복보다 ‘좋은 삶’ 추구해야… 경제민주화 입법도 그에 기여하는 것”

박근혜정부의 아이콘을 말하라면 창조경제와 함께 행복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민행복시대’ ‘행복주택’ ‘국민행복기금’ 등 어떠한 정책에도 행복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야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말에서 왜 자꾸 ‘1984년’(조지 오웰)의 ‘더블 스피크’(이중언어)가 떠오르는 걸까. “무지는 힘, 자유는 예속, 전쟁은 평화”라는 소설 속의 슬로건처럼 구호가 된 행복은 우리 국민들이 처한 불행을 더 뚜렷이 부각시킬 뿐이다. 높은 자살률, 체감 행복도의 국제비교는 굳이 들고 싶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행복은 가장 모호한 단어 가운데 하나이고,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개념이다. 행복의 사전 풀이는 ‘①복된 좋은 운수 ②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행복은 불행의 반대말로서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행복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불행의 얼굴은 단조롭다. 질병, 재앙과 사고, 찢어질 듯한 가난, 불화와 다툼, 장시간 노동, 무력감 등은 동서고금의 누구나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이런 불행이 없는 상태에서부터 찾기 시작해야 한다.

최근 출간된 두 권의 책이 행복에 관한 비판적 고찰을 담고 있다. 철학자 탁석산씨가 펴낸 ‘행복 스트레스’(창비)와 로버트와 에드워드 스키델스키 부자(父子)가 쓴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부키)가 그것이다. 두 책은 모두 추상명사인 행복 대신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좋은 삶’을 추구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행·불행을 떠나 좋은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 더 낫다.”(탁석산) “성장의 추구에서 행복의 추구로 옮겨 가는 것은 하나의 거짓 우상을 또 다른 우상으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스키델스키)

탁씨는 좋은 삶을 위협하는 요인들로 고립, 즉흥적 쾌락, 가짜 관계, 행복에 대한 집착, 상품화, 추상화 등을 꼽았다. 반면 좋은 삶의 구성요소로 개인, 이웃, 사회의 3분의 1 원칙, 즉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의 행복까지 생각하는 삶을 제안한다. 개인에게는 수행이,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예의가, 사회에는 평등과 공동의 부가 각각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산악 동호회와 같은 관계망처럼 돈으로 환산할 수 없어서 거래가 되지 않는 영역이 많을수록 좋은 삶에 가까이 갈 수 있다.

각각 경제학자와 철학자인 스키델스키 부자는 끝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성장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좋은 삶을 보장해 주는 기본재를 추구할 것을 제안한다. 기본재는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 등 7가지다. 이를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성장을 멈추고 소득 불평등, 일하라는 압력 및 소비 압력을 줄여야 한다. 구체적 정책수단은 일자리 나누기, 법정휴일의 확대,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과 누진소비세의 도입, 광고의 제한 등이다.

박근혜정부가 국민행복시대를 여는 수단으로 제시한 ‘고용률 70% 로드맵’과 시간제 일자리 늘리기는 좋은 삶을 추구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의 전제조건인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정부의 행보는 느리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을 방해한다는 누명을 쓰고 있는 경제민주화를 위한 국회의 입법 움직임에 대한 재계의 반발에 맞장구를 치며 어깃장을 놓고 있다. 증권분야에만 도입돼 있는 집단소송제의 확대적용, 대체 휴일제, 근로시간 단축 등은 재계의 반발에 부닥쳐 운명을 알 수 없다.

경제민주화 입법안들은 평등과 안전, 그리고 여가를 증진시켜 좋은 삶에 기여하는 것들이다. 재계는 과거에도 주5일제 도입이나 복수노조 허용을 앞두고 기업들이 모두 망할 것처럼 엄살을 부렸지만, 도입 후에 어떠한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은 없다. 이쯤 되면 우리의 행복, 아니 좋은 삶을 가로막는 자들이 누구인지 보일 것이다. 경제단체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기득권을 지키려는 재벌과 그들의 로비에 굴복하는 정부와 일부 국회의원들 말이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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