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보고서 ‘무소신·무책임’… 개미들만 피멍 든다 기사의 사진

“We have no new thoughts. Sell.”(새로운 생각이 없다. 팔아라.)

최근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증권 보고서’가 화제였다. 지난달 24일 오펜하이머자산운용이 ‘유동하는 자산’이라는 제목으로 발행한 한 쪽짜리 보고서에는 이 같은 단 두 문장이 담겨 있었다. 짧은 길이도 이슈였지만 명쾌한 매도 의견 자체가 회자됐다.

증권가에서 나오는 분석 보고서들은 미래를 궁금해하는 투자자에게 언제나 최고의 관심거리다. 그만큼 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현재 국내 주식시장의 최대 이슈인 삼성전자 추락도 지난달 초 JP모건의 목표주가 하향 보고서 한 줄에서 시작됐다. 리서치센터들은 날마다 과학적인 분석으로 무장하고, 우수인력 확보를 위해 물밑에서 스카우트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소신 있는 ‘매도 의견’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은 국내 금융투자업계의 근원적 한계로 지적된다. 주가가 올라갈 때는 보고서가 쏟아지는 반면 급락 장세에는 발표 건수가 줄어들기도 한다. 한 리서치센터장은 장밋빛 전망만 내놓는 업계의 관행을 ‘책임 회피’라고 정면으로 꼬집었다.

◇상승장에선 ‘지나친 장밋빛’…하락장에선 ‘침묵’=7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FnSpectrum)에 따르면 30개 국내 증권사가 전망한 삼성전자의 1년 뒤 주가는 평균 190만2143원이다. 지난 5일 유가증권시장에서 마감된 삼성전자 주가는 126만7000원이었다. 증권사들의 전망과 삼성전자의 현재 기업가치 차이(괴리율)는 50%를 넘었다. 1년 뒤 가격으로 210만원을 제시한 KDB대우증권은 투자자들에게 연 65.75%의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고 제시한 셈이다.

투자자도 증권가 보고서가 대체로 낙관적임을 알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 주가 전망을 두고 이런 낙관주의는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익명을 원한 한 증권사 연구원은 “지난 5일의 삼성전자 주가 동향은 역시 외국계 금융회사의 분석대로 장이 펼쳐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줬다”고 토로했다. JP모건은 삼성전자에 혁신이 부족하다며 냉정하게 지난달 목표주가를 하향 조정했다. 국내 금융투자업계는 삼성전자를 비호하며 실적을 기다려 보자고 했지만 잠정 실적이 발표되자 하락 폭만 더 커졌을 뿐이다.

‘장밋빛 보고서’는 막상 주식시장이 침체에 빠져들 때면 입을 굳게 다문다. 양적완화 출구전략 이슈가 불거진 지난달에 국내 증권사에서 내놓은 종목 보고서는 총 837건이었다. 지난 5월(1777건)보다 52.9% 감소한 수치다. 특히 JP모건의 매도 보고서가 나온 지난달 첫째 주에 국내에서 발행된 종목 보고서는 평소의 절반 정도인 162건에 불과했다. 투자자의 궁금증이 실제로 커지는 상황에서는 되레 침묵하는 것이다.

◇주가 99.5% 하락해도 책임진 리서치센터는 한 곳도 없어=한국의 ‘닥터 둠(경제 비관론자)’으로 불리는 이종우 아이엠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투자자들만 피해를 입게 만드는 낡은 관행을 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매수를 부추기는 의견만 많고, 용감하게 매도를 외치는 보고서가 없다는 지적이다.

이 센터장은 “2000년 하이닉스 주가가 4만6000원 선일 때 증권사들은 하이닉스 주가가 8만원까지 갈 것이라고 앞다퉈 전망했다”며 “하지만 하이닉스는 정보기술(IT) 버블이 걷히면서 감자를 시행, 하한가 행진을 거듭하다 2003년 결국 125원까지 추락했다”고 꼬집었다. 주가가 99.5% 하락했을 때 책임을 진 리서치센터는 한 곳도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 ‘과도하게 주가가 하락한 하이닉스를 분석 대상에서 제외한다’고만 설명했다. 이 센터장은 “장밋빛 의견에 희생당한 이는 결국 개미들이었다는 점을 명심하고, 후배들은 직을 걸고 보고서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금융투자업계의 ‘장밋빛 보고서’는 다시 검증대에 오른다. 삼성전자에 한 차례 쇼크를 안긴 JP모건이 삼성전자의 잠정 실적 발표 이후 또 부정적 보고서를 냈기 때문이다. JP모건은 스마트폰 실적 약화로 삼성전자의 하반기 이익이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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