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기석] 성품 없는 지식의 위험 기사의 사진

아시아나 항공기 충돌 사고가 세인의 관심을 독점하고 있다. 한동안 뜨겁게 달아올랐던 국가정보원 사태나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대한 논쟁도, 이집트의 정변에 대한 염려도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듯한 느낌이다. 사고 원인에 대한 설왕설래가 한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사람들의 공분을 사는 일이 일어났다. 종편방송 채널A의 한 앵커는 사고 소식을 전하면서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 2명이 사망자로 파악됐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들의 타들어가는 마음을 위로하려고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애국심을 넌지시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사용한 ‘우리’라는 대명사의 범주에 나도 포함되는 것이라면 나는 단호히 거절하고 싶다.

기신없는 사람의 말실수를 갖고 뭘 그리 민감하게 구느냐고 타박하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 각인된 세계관과 연관된 문제이기에 심각하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것, 타자의 자리에 서보지 않는 것. 한나 아렌트는 이런 것을 무사유라고 했다. 무사유는 모든 전체주의의 뿌리가 된다.

이기적인 自我 넘어서야

마하트마 간디가 말하는 7가지 치명적인 사회악 가운데 한 가지는 ‘성품 없는 지식’이다. 이기심과 사욕의 바탕 위에서 작동되는 지식은 자신과 타자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곤 한다. 이기적인 자아를 넘어서지 않는 한 진정한 지식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다. 자기를 비껴간 위기 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해도, 불행을 겪는 타자들로 인해 차마 웃지 못하는 것이 또한 인간됨이다. 그 사람이 설사 나와는 무관한 사람이라 해도 말이다.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승무원들이 보여준 책임감이다. 느닷없는 사고에 직면해서 그들 역시 공황상태에 빠질 수 있었지만, 그들은 이내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인식했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승객들의 안전한 탈출을 도왔고, 부상자들을 업어 나르기도 했다. 훈련받은 대로 한 것이지만 그들의 숭고한 책임감은 아름답다.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와 아브라함은 모두 순종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늘 자기를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신은 노아가 아닌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 역사를 새롭게 했다. 무엇 때문일까? 아브라함에게는 있고 노아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웃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동방의 왕들에게 붙잡혀갔다는 전갈을 듣는 순간 서슴지 않고 출정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신의 계획을 알아차렸을 때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를 묻는다. 그는 이웃들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 했던 것이다. 노아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멸절을 앞둔 세상 때문에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의 일에 이의를 제기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다.

이웃 고통 공유하는 마음 절실

이 마음이 소멸하고 있는 시대는 위험사회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런 시대에 등장하는 막장 인생들을 가리켜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인”이라 했다.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 인간의 소명이다. 자기 동일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은 비인간으로 추락한다. 인간의 인간됨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함을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무정함이 넘치는 사회,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이 쉽게 발설되는 세상은 너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끊어진 사회이다. 무의식 중에라도 그 불행을 겪은 것이 우리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참상을 겪은 이들의 아픔이 허비되지 않기를 바란다.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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