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무라카미 하루키, 왜 지구촌에서 읽히나 기사의 사진
[임순만 칼럼]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열풍은 이제 문학비평을 넘어 사회비평의 대상이다. 장편소설 ‘1Q84’ 후 3년 만에 선보인 그의 최신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초판 20만부가 인쇄돼 이달 초 서점에 깔리자마자 바로 베스트셀러 1위로 뛰어올랐다. 평일 대낮의 서울 주요서점에 독자들을 줄 서게 만드는 작가는 국내외를 통틀어 하루키 외에는 없다. 이 소설은 지난 4월 일본에서 초판 50만부를 찍어냈고, 일주일 만에 100만 부가 넘는 판매기록을 세웠다. 소설만이 아니다. 이 작품의 주요 테마로 등장하는 러시아 피아니스트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는 절판된 음반이었음에도 복간되어 클래식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작가. 연전에 미국 샌프란스시코 공항에서 워싱턴DC로 가기 위해 비행기 보딩을 기다리던 중 중년의 남녀 두 명이 공항 통로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행기에 탑승을 하고 보니 마침 그들 옆좌석에서 앉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영역된 하루키 소설 ‘양을 둘러싼 모험’을, 또 한 사람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읽고 있었다. 워싱턴의 한 로펌에 근무하는 부부 변호사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이들은 바빠서 소설을 거의 읽지 못하지만 하루키 소설만은 틈틈이 본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엔가는 저녁 늦은 시간에 지하철 경로석에서 두툼한 책을 읽고 있는 노인을 봤는데 제목을 봤더니 하루키 소설 ‘1Q84’였다. 어르신이 이런 소설을 읽는 것은 좀 뜻밖이라고 말을 걸었더니 누군가의 소개로 읽기 시작했는데 조금 읽다 보니까 정신없이 읽게 된다고 했다. 읽고 있는 곳은 3권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1권이 700여 페이지, 2권이 600여 페이지, 3권이 750여 페이지니까 벌써 2000여 페이지를 읽은 것이다. 76세라고 했다.

하루키 독자들은 이런 식이다. 국경이 없고 남녀노소가 없다. 에세이나 소설은 물론 그가 언급하는 음반이나 치노팬츠, 로퍼, 태그호이어 같은 물건들도 유행이 되는 세상이다. 국내 일각에서는 하루키를 읽는 것이 ‘수준이 낮다’거나 ‘하루키가 과대평가됐다’는 시각도 있지만, 이는 하루키의 독창적인 어법을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닐까 싶다. 과대평가된 작가가 30년 이상 지구촌을 사로잡을 리가 없다. 더구나 하루키는 고갈되어가는 작가가 아니라 세월이 지날수록 독자층을 넓혀가는 작가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비롯해 일본 거의 모든 문학상을 수상했고, 프란츠 카프카상(2008년), 예루살렘상(2009), 카탈로니아 국제상(2011) 등 지구촌 굴지의 상을 휩쓸고 있다. 더구나 예루살렘상과 카탈로니아 국제상은 문학상이 아니다. 세계 굴지의 국제정치 및 사회·인문분야의 상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선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 상의 수상연설인 ‘벽과 알’(예루살렘상), ‘비현실적 몽상가’(카탈로니아 국제상) 등을 읽어보면 세계의 도시에서 왜 하루키를 꼽는지, 하루키가 수상하러 온다는 소식만으로도 현지 언론이 왜 들끓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 평이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설명하려고 아우성친다

대부분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세상을 산다

하루키는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이유다


지구촌에서 이처럼 하루키가 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하루키는 설명하지 않는 작가라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는 어떤 작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한 하루키의 특징이다. 작가는, 또는 화자(話者)는 누구나 자기의 세계를 설명하려 한다. 대부분 자기가 말하는 것을 전달하고, 이해시키고, 동화시키기 위하여 이야기의 톤을 높이고 아우성을 친다. 세상이 시끄럽고 거칠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자 윤창중은 격문(檄文) 직설(直說)을 날려 청와대 대변인이 되었지만 단 몇 개월도 버티지 못했다. 국가정보원장 남재준은 국정원이 2급 기밀문서로 분류해 보관해온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일반문서로 재분류해 세상에 공개해 국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민주당 원내대변인 홍익표는 “만주국의 귀태(鬼胎)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귀태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고 말했다가 사흘도 버티지 못하고 대변인에서 사퇴했다. 자기 격정과 독단을 제어하지 않거나 제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설명하지 않는다. 직설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통이 잘되는 방법을 찾아낸다. 하루키가 지구촌 어디서든 독자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설명하는 대신에 하루키는 깊이 있게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린다. 최종적인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설명하는 것은 쉽다. 설명하지 않고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하루키는 작가가 직접 판단하지 않고 독자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매력적인 형태의 다른 것으로 만들어 제시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어떤 대목이라도 따분한 경우가 거의 없다. 작가가 이래저래 관여하면 글의 깊이가 없어지고 하나의 설명으로 고착화되기 마련이다. 부모가 책을 읽지 않는 아이에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말하면 말할수록 아이는 부모를 따분해한다. 그러나 그 대신에 ①여행을 함께 가거나 아니면 공원에라도 놀러가서 친밀감을 높이고 ②어느 날은 도서관에 가서 지식에 대한 흥미를 북돋아주고 ③서점 구경을 가거나 아이의 방에 꽃이라도 꽃아 놓아 쾌적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면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듯 하루키는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주입하는 대신에 가설(假說)을 쌓아가면서 자신의 세계를 완성시킨다. 그렇게 가설을 쌓아가는 것을 그는 ‘마치 잠든 고양이를 안아드는 것’으로 비유한다. 이야기라는 아담한 광장 한가운데 잠든 고양이처럼 포슬포슬한 가설을 얼마나 자연스럽고 솜씨 좋게 쌓을 수 있는 지가 바로 소설가의 역량이라고 본다. 그가 만들어내는 가설의 공명(共鳴)이 의외로 기똥차고 산뜻한 느낌을 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의 출세작 ‘노르웨이의 숲’은 우리나라에는 처음에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소개됐었다. 성인으로 성장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이 느끼는 상실감을 다룬 이 소설은 분명 ‘상실의 세계’, 혹은 ‘상실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하루키는 자신의 작품 제목을 ‘상실의 시대’와 같은 문예(文藝)형 또는 설명형으로 만드는 작가가 아니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포슬포슬하게 잠든 고양이로 만드는 작가가 바로 하루키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소설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것을 꺼려하는데, 아주 예외적으로 자신의 소설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에세이. 한 독자가 “며칠 전에 시험을 봤는데 원고지 4매(일본 원고지는 400자,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8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시오’라는 문제가 나왔다. 혹시 그런 문제를 받는다면 하루키씨는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다.

이에 대해 하루키는 “원고지 4매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굴튀김에 관한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며 굴튀김으로 이야기를 바꾼다. 여기서 ‘굴튀김’이란 어떤 하나의 대상 혹은 사상(事象)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은 ‘사물과 자기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와 방향을 데이터로 축적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관찰(가설)이 동원되고, 비유로 사상(事象)과 그 이면을 오가는 그네타기를 시도한다. 비유가 하나의 사상 A를 설명하기 위하여 멀리에 있는 다른 사상 B를 불러다 대비시키는 일이라면, 단언컨대 하루키는 이 세상 작가 중에서 가장 먼 A와 B 사이의 그네를 탈 수 있는 작가라고 보면 될 것이다(출전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일본평론가가 이같은 분석을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만큼 비유가 참신하다는 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굴은 어느 깊은 바다 속에 있었다. 밤낮없이 단단한 껍데기 속에서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접시 위에 있다. 튀김으로 변한 굴을 젓가락으로 찔러보면 똑같은 굴이다. 그러나 다른 굴이다. 바삭한 튀김옷을 입힌 굴의 감촉과 향이 축복처럼 입안에 퍼진다. 나는 이런 굴튀김을 만드는 사람이다. 식사를 마치고 역을 향해 걸어갈 때 어렴풋하게 굴튀김의 조용한 격려를 느낀다. (…). 그렇게 제시하는 가설들이 층층이 쌓여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움직여나가고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 하루키는 진정한 나를 설명하는 대신에 ‘굴튀김이란 소재를 잘 풀어서 가설을 쌓아나가는 것’으로 ‘진정한 나’를 그려낼 수 있다고 본다. “굴튀김에 관해 이야기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것이다.

2. 독창적인 유기체를 만든다

설명하는 대신에 보슬보슬한 가설을 세워나간다

세상 겉모양과 이면 사이에서 비유의 그네를 탄다

결정적인 부분에서 독자들이 판단하게 만든다


하루키는 작가의 판단 대신 ‘가설의 틀 세우기’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묘사’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설명은 직접적인 개입이고, 묘사는 형상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이때 하루키가 특징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색다른 비유와 독자들의 예상을 넘어서는 설정이다. 그의 ‘빌리 홀리데이 이야기’라는 글에서 예를 들어본다.

젊은 하루키가 도쿄 외곽의 작은 빌딩 지하에서 재즈 바를 운영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따금 한 미국 흑인 병사가 일본 여성과 함께 가게를 찾아온다. 재즈 바를 찾아오는 흑인 병사라고 하면 독자들은 시끄럽고 덩치 큰 군인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하루키가 설정한 병사는 조용하고, 호리호리한 일본 여성과는 친구이면서도 미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내성적인 젊은이였다. 독자들의 예상을 가볍게 벗어난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재즈를 듣고 가끔 빌리 홀리데이의 판을 틀어달라고 부탁한다. 20세기를 감동시킨 재즈 3대 디바 중 첫 번째로 꼽히는 흑인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

어느 날 흑인 병사는 혼자 찾아와 구석 자리에서 빌리 홀리데이를 들으며 조용히 어깨를 흔들면서 운다. 하루키는 흑인 병사가 무안해 할까봐 못 본체 하며 다른 일을 한다. 그것이 그 병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후 일년쯤 지나 함께 오던 여성이 혼자 나타난다. 어느 비 내리던 가을밤이었다. 여자는 그 병사가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병사는 고향 사람들이 그리워질 때마다 이 가게에 와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었다고, 이 가게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고. 그녀는 그리운 듯 추억을 풀어놓았다.

“그런데 그가 지난번에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자기 대신 그 가게에 가서 빌리 홀리데이를 들어달래요.” 빌리 홀리데이의 판이 다 돌아가자 그녀는 레인코트를 조심스럽게 걸쳤다. “여러모로 고마웠습니다.” 그 인사를 듣고 하루키는 적절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얼마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설)들의 조합인가. 하루키는 ‘재즈란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재즈란 무엇인가. 빌리 홀리데이란 누구인가. 그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삽상하게 흑인병사와 일본여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런 결론으로 유도한다. “나는 지금도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조용했던 그 흑인 병사를 떠올린다. 멀리 떨어져 조국을 그리며 카운터 한쪽 구석에서 소리 죽여 흐느껴 울던 남자의 모습을. 그 앞에서 조용히 녹아들던 온더록의 얼음을. 그리고 멀리 떠나간 그를 위해 빌리 홀리데이를 들으러 왔던 여성을. 그녀의 레인코트 냄새를. (…). ‘재즈란 어떤 음악인가요’하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이런 게 바로 재즈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재즈란 그런 존재다. 꽤나 긴 정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재즈라는 음악에 대해 이보다 더 유효한 정의는 알지 못한다.”라고.

이것을 이번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를 통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다. 주인공 쓰쿠루는 나고야에서 성장하며 고교시절 5명의 그룹 멤버들과 아주 친하게 지낸다. 그 그룹이 주인공에게는 세상의 중심이다. 혼자 도쿄의 대학에 진학한 쓰쿠루는 대학 2학년 어느 날 한 멤버로부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절교 통보를 받는다. ‘그냥 사라져 줘.’ 이것이 쓰쿠루를 뺀 네 명의 공통된 의견이라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아무리 만남을 시도해도 그들은 쓰쿠루를 외면했다. 그날 이후로 쓰쿠루의 세상은 달라진다. 모든 의욕을 잃게 되고 늘 죽음의 곁에서 사는 세월이 이어진다. 16년이 지나 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됐을 때 여자친구는 쓰쿠루에게 그 상처를 해소해야만 한다는 조언을 해준다. 그리고 여친은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네 명 중 세 명의 현재의 위치를 검색해 알려준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쓰쿠루는 그들 네 명을 하나하나 만나는 순례여행길에 오른다. 일종의 추리의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였던 여자 멤버(白)는 강간당한 후 심한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다 외딴 곳에 가서 살해당했음이 밝혀진다. 그러나 누구도 쓰쿠르가 죽은 여자 멤버(白)를 강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16년 전에 그를 강간범으로 몰아 왕따 시켰는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주인공은 이야기의 키를 쥐고 있는 다른 여자 멤버(黑)를 만나기 위해 핀란드로 간다. 그녀는 핀란드 남자와 결혼해 일본을 떠났다. 그녀는 긴 이야기 끝에 이렇게 말한다.

“괜찮다면 나를 안아주지 않을래?”

여기에 포인트가 있다. 작가는 친구들이 왜 쓰쿠루를 강간범으로 몰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작품 어디에도 그런 설명은 없다. 그러나 “괜찮다면 나를 안아주지 않을래?”라는 말은 직접적인 설명 그 이상이다. 그녀(黑)는 심각한 정신분열 상태에 빠진 친구(白)를 치유시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남몰래 연정을 품고 있던 쓰쿠루를 곤란한 상태에 빠뜨리기 위해 쓰쿠루를 강간범으로 몰았던 거였고, 작가는 ‘괜찮다면 나를 안아주지 않을래?’ 이 한마디로 모든 미스터리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이것은 고해성사이자 화해와 치유의 장치다. 이런 부분에서 하루키의 소설은 날개를 단다.

작가는 덧붙인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3. 답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

잇쇼켄메이(一生懸命) 같은 무거운 말은 쓰지 않는다

캔맥주와 음악처럼 가벼운 어법을 동원한다

그러나 세상을 탐색하는 치밀함은 당대 최고다


하루키는 집요하고 극한적인 묘사에 매달리지 않는 작가다. 매달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장을 배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1979년 첫 데뷔작이자 ‘군상(群像)’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첫 문장에서 “완벽한 문장은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말야.”라고 쓰고 있다. 이 말은 그가 문장에 대해 상당히 고심했음을 알려주지만 동시에 그가 문장에 매달리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 뒤에는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내가 대학생 때 우연히 알게 된 어떤 작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참뜻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당시에도 최소한 그 말은 내게 일종의 위안이 되기는 했다.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그러나 그래도 역시 뭔가를 쓰려고 하면 언제나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은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코끼리에 대해서는 뭔가를 쓸 수 있다 해도 코끼리 조련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런 뜻이다. 8년 동안 나는 계속 그런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8년 동안. 긴 세월이다.”

이렇게 토로하는 하루키가 들고 나온 문장은 집요하면서도 극한으로 밀고 가는 문장이 아니라 심플하고도 쿨한 문장이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기구치 칸(菊池寬),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등 일본 문예미학의 정점을 찍었던 작가들을 그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문장은 한없이 아름답고 다루는 세계는 똑떨어지는 일본 문예미학의 대가들을 언급하는 대신 데릭 하트필드,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커트 보네거트, 리차드 브라우티건 같은 미국 작가들에게서 소설을 배웠다고 말한다. 특히 첫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그는 소설의 많은 것을 데릭 하트필드에게서 배웠다고 여러 군데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트필드 자신은 모든 의미에서 ‘불모’의 작가였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문장은 읽기 힘들고 스토리는 엉망이고 테마는 치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트필드는 글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뛰어난 작가 중 하나였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와 같은 동시대의 작가와 견주어도 하트필드의 그 전투적인 자세는 결코 뒤지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하트필드 자신은 마지막까지 자기가 싸우는 상대의 모습을 명확하게 포착하지 못했다. 결국 불모라는 건 그런 뜻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데릭 하트필드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아직도 하트필드는 어떤 작가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다. 하트필드는 하루키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분석이 대세를 이루지만, 중요한 것은 “글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 작가, 그러나 끝내 불모의 작가”라는 하루키의 관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글을 무기로 싸운다’거나 ‘끝내 불모’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그가 자주 언급한 나머지 작가들, 즉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커트 보네거트, 리차드 브라우티건 같은 작가들을 연결시키면 대략 떠오르는 것이 있다. 설명하지 않고 무진장한 유머와 단문으로 치닫는 커트 보네거트, 고정적인 주인공이나 스토리가 없이 에피소드를 이어가면서 놀라운 상상력을 펼쳐내는 리차드 브라우티건. 이들이 문장을 통해 세상과 대결한 기록은 치열하다. 그런 반면 끝내 불모성으로 추락했음을 미국문학사는 안타까워 한다. 레이먼드 카버는 누구인가. ‘대성당’ ‘발 밑에 흐르는 강’ 등을 남긴 레이먼드 카버는 현란하게 기교를 부린 문장은 아예 때려치우고 일상어로 소박한 경이로움의 세계를 보여준 작가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의 문장이 추가되면 독자의 상상력이 허물어지고, 반대로 하나의 문장이 생략된다면 이야기 자체가 허물어질 정도로 작품을 정밀하게 구성한 작가였다. 이들의 결합이 하루키라고 보면 묘하게 짚이는 데가 있을 것이다. 공통점은 이들이 불모의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문장으로 세상의 객관화에 대해 치열하게 싸웠고 끝내 무너진 작가들이라는 사실. 이 점이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만들어냈던 일본 선배 작가들과 하루키의 차이점이다.



세계의 고정성에 갇히지 않는다.

계속적인 탐색 과정에 있다.

완성되지 않는 불모성을 전제로 한다.


하루키는 계속 변화하고 있지만 이 같은 기본적인 글쓰기의 틀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루키는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야기의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하루키 작품의 주제이자 방법론이다. 앞에서 하루키는 설명하지 않는 작가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하루키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작가”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하루키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작가(혹은 주인공)와 세계 사이에 놓인 거리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가설과 비유와 에프소드 속에 드러나는 몇 개의 프리즘. 어떤 것은 밝혀지고 어떤 것은 질문 속에 들어있거나 과정 그 자체가 답이 되기도 한다.

이번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역시 몇 개의 부분을 미해결의 장으로 남겨두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는 하루키의 작품에서 어떤 식으로든 다시 등장할 것으로 기대되는 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정한 정도로 하루키의 소설이 가볍다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그런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0년 이상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고, ‘하루키 현상’이라는 사회·문화적인 신드롬이 확산되고 있으며, 하루키의 독자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어법과 소설방법론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잘 소통하고 있는 작가를 우리의 거대담론의 틀로 재단해보려는 시도는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임순만 편집인 겸 논설실장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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