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 13일 충북 충주에서 김보은과 그의 남자친구 김진관은 12세 때부터 10여년 동안 자신을 강간한 의붓아버지를 살해했다. 전국 곳곳에서 구명운동이 벌어졌고, 변호인단은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살인죄로 판결을 내렸다.

20년 뒤인 지난해 10월 의정부지검은 강제로 키스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어 3분의 1가량을 자른 혐의로 입건된 20대 여성을 불기소 처분했다. 경찰은 남성을 강간미수, 여성을 중상해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지만 검찰시민위원회는 “혀를 깨문 것이 피해자가 처한 위험(성폭행)에 비해 과도한 대항이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정당방위를 인정했다.

근대 초기까지 정당방위는 인간의 자연적 권리로 여겨졌고, 범위도 폭넓게 인정됐다. 조선시대에는 부모가 살해당하거나 폭행을 당할 때 현장에서 가해자를 살해해도 무죄였다. 성폭행 가해자도 마찬가지였다. 이수광이 쓴 ‘조선 명탐정 정약용’을 보면 세종 15년(1433)에 공신 이숙번의 15세 여자종 소비(小非)가 자신을 겁탈하려는 주인의 이마를 칼날로 찔러 상하게 했지만 처벌받지 않았다.

중국 주(周)나라 때는 관아에 사적 형벌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었다.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고 관리에게 원수의 이름을 제출하면 그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무장하지 않은 17세 흑인 소년을 총으로 살해한 히스패닉계 마을 자경단 단장 조지 짐머만이 정당방위법(스탠드 유어 그라운드 로·Stand your ground law)에 따라 최근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미국이 들끓고 있다. 2005년 처음 플로리다주에서 도입된 이 법은 자택 밖에서도 신체적 위해 없이 심리적 위협을 받는 상황이라면 총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미 전역에서 규탄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각장애 흑인가수인 스티비 원더는 “정당방위법이 폐지되지 않으면 플로리다에서 노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플로리다 관광 보이콧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 편의점에서 사탕을 사들고 나오는 멀쩡한 소년을 죽이고도 정당방위로 풀려났으니 복장이 터질 일이다. 백인 소년이 죽었어도 그랬을까. 그것도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니 아이러니하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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