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정기] ‘슬프고 부끄럽다’는 말 기사의 사진

“슬프고 부끄럽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일 뮌헨 인근 다하우 나치 강제수용소를 찾아가 전쟁범죄에 대해 참회하며 한 말이다. 이 수용소는 ‘신성한 국가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유대인 폴란드인 정치범 20만명에게 생지옥의 고통을 겪게 한 곳이다. 신나치즘 확산에 경계심을 표하는 가해자 독일 총리의 옆에는 수용소에서 부모와 아내를 잃은 93세의 피해자가 휠체어에 탄 채 함께 있었다.

독일의 반성과 책임의식 일관적

어쩌면 이리 다를까!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지난 15일 전몰자 추도사에서 아베 신조는 ‘아시아 제국의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긴 데 깊은 반성과 더불어 희생당한 분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는 언급을 뺐다. 1993년 이래 일본의 모든 총리들이 말했던 내용이다. 나치의 범죄, 2차 세계대전의 희생, 그리고 대학살(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반성 행동과 책임의식은 일관적이다. 1970년 12월 7일 비 내리는 폴란드 바르샤바 전쟁 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 꿇고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를 사죄하던 빌리 브란트 총리를 세계는 기억한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을 앞세운 나치에 애정을 표하는 독일 공직자와 정치인은 없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일제의 위안부 운영을 합리화하는 오사카 시장, 전쟁범죄자들을 나라의 영웅으로 받들자는 수많은 정치인과 공직자들, 나치 방식을 배워 슬쩍 군국주의 체제를 복원하자는 부총리. 총리 아베는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사과를 인색하게나마 포함한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지 않을 것이며(2013년 4월 22일), 침략의 정의는 학계나 국제적으로 정해진 것이 없고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4월 23일)는 해괴한 주장을 펼친다. 그는 지난 5월 ‘731’이라는 숫자가 선명한 항공자위대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731’이라는 숫자는 중국인, 한국인, 러시아인 등을 잡아다 진공상태에서 어떻게 내부 장기가 터지는가를 ‘실험’하고, 세균을 주입해 생사람이 죽는 모습을 ‘실험관찰한’ 하얼빈 731 생체실험부대를 상징한다. 비판이 일자 우연의 일치라고 했다.

아베 레토릭, 언어폭력만 가득

아베의 레토릭에는 문명과 상생의 철학은 부재하고 언어폭력만이 가득하다. 아시아를 침략한 역사의 교훈에서 얻는 지혜도 없고, 이웃 나라들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한 배려도 없다. 양방향적 진정한 대화 대신 역사 짜깁기의 일방적 선동만이 우렁찬 새디즘의 폭력이다. 신체를 위해하는 공격행위만 폭력이 아니다. 언어를 통해 상대방을 비하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것도 폭력이다. 상대방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부정과 폄하, 모욕과 악담, 괴롭히고 조롱하고 저주하는 행위는 모두 폭력이다.

2차 세계 전쟁을 두고 가해자 독일의 총리는 슬프고 부끄럽다고 한다. 또 다른 가해자 일본의 총리는 침략은 보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아베식으로 하면 히틀러와 태평양전쟁의 주범 도조 히데키는 나라를 위한 순국(殉國) 영웅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일본 총리의 피해자에 대한 언행은 리더십의 차이를 넘어 문명의 진화에 대한 시험이고 대결이다. 일본 열도에 울리는 군국주의로의 복고 메가폰은 동북아 평화와 인류 문명에 대한 공습경보다.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사회를 지향한다면서 군국주의로 치달았던 일본. 21세기에는 ‘슬프고 부끄럽다’는 서구 독일의 아름다운 정신을 제대로 배울 것을 권한다.

대한민국도 일제와 관련해 어떤 일본을 원하는가에 대해 경제의 눈치를 보지 말고 명명백백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민(民)은 정치인들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역사를 이용하는 반문명적인 나쁜 레토릭에 부화뇌동하는 ‘시민의 타락’이 없도록 합심해야 한다.

김정기(한양대 교수·언론정보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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