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김성국] 어느 노부인의 방문 기사의 사진

스위스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가 쓴 ‘노부인의 방문’이라는 희곡이 있다. 스토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55년 스위스의 조그만 국경마을 귈렌에 한 노부인이 방문한다. 그녀는 원래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클라라인데 17세 소녀 시절, 마을 청년 알프레드와 사랑에 빠져 임신까지 했는데 알프레드는 자신이 애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인할 뿐 아니라 클라라를 무고죄로 고소까지 했고 이어진 재판에서 그녀는 알프레드가 매수한 증인들의 위증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마을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부정한 여인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고향에서 쫓겨난 그녀는 아기까지 잃게 되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거리의 여인으로 살다 우연한 기회에 한 석유재벌 아들과의 결혼을 시작으로 이후 여덟 차례의 결혼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으게 되자 자신을 버린 알프레드에게 복수를 하고자 45년 만에 다시 고향마을을 찾게 된 것이다. 그녀가 고향을 방문했을 때 마을의 경제 상황은 세계적 공황과 전쟁 여파로 실업자가 넘쳐나는 등 극도로 피폐해 있었다.

억만장자 노부인은 마을 주민들에게 외국에서 가져온 값비싼 선물들을 돌리면서 환심을 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장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을 찾아가 마을의 경제 발전을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그 조건이란 누구든지 알프레드를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클라라의 귀환을 전해들은 알프레드는 70년 동안 같은 마을에 함께 살아온 이웃들이 아무리 그녀가 물질공세를 편다고 해도 자신을 지켜줄 것으로 굳게 믿으며 마을을 떠나지 않고 버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점점 알프레드에게 적대적으로 변해갔고 절친들도 하나둘씩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을의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알프레드는 마침내 주민총회에 불려나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욕설을 들은 다음 어둠속으로 끌려가 살해당하고 만다. 그의 죽음을 확인한 노부인은 약속한 거금을 시장에게 지불한 뒤 가져온 관 속에 알프레드의 시신을 담아 홀연히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극은 막을 내린다.

이 이야기는 과연 돈으로 정의를 살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경제적 번영과 사회 정의, 공리주의와 윤리가 충돌할 때 사람들은 무엇을 따라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2차 세계대전 후 온통 경제 재건만을 위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고 있던 유럽인들에게 잠시 멈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세월은 흘러 2013년 8월 20일, 독일 뮌헨 인근의 다하우의 옛 강제수용소를 어느 노부인이 방문한다. 그녀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연방총리. 그 노부인은 나치정권 시절 수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현장이었던 수용소에 헌화하고 고개 숙여 묵념을 올렸다. 당시 수감자를 대표해 93세의 한 백발노인이 휠체어를 타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앞서 클라라의 고향 방문에서 볼 수 있었던 장면들, 즉 억울한 과거 판결에 대한 분노라든지 자신을 추방한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옛 연인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은 이 노부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슬픔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낀다”며 70여년 전 자신의 부모 세대가 자행한 용서받기 어려운 악행에 대해 딸로서 간절히 뉘우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세계적 경제대국이 된 지위를 활용해 이웃들에게 물질적 혜택을 주면서 정의를 사려고 하거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떤 변명을 하거나 면죄부를 받으려고 하는 시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부끄러운 과거사에 대해 슬퍼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광복 68주년을 맞으며 한때 가해자였던 독일을 대표하는 노부인의 고개 숙인 모습을 매우 착잡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우리를 괴롭힌 가해자에게서는 언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김성국 이화여대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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