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민주주의에 대한 과욕 혹은 과신 기사의 사진

“민주당, 국회 주인으로서 청와대 손님 맞아 국리민복의 길을 묻고 답해야”

‘바꾼 애들 감빵으로, 바뀐 애는 방 빼.’

민주당의 어느 의원이 지난 7월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문구다. ‘국정원 대선개입’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던 정부 비판자 혹은 야당 지지자들이 내건 구호라고 했다. 그 직설적 표현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촛불집회의 구호 ‘국정원 해체 박근혜 하야’ 그것이다.

민주당은 3자회담의 목전에 이르러서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집요하게 요구한다. 국가정보원이 대선에 개입했으니 그 결과로 당선된 박 대통령이 이를 시인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선불복’은 아니라는 말에 솔깃해 ‘사과’의 ‘사’자, ‘유감’의 ‘유’자라도 꺼내면 그게 또 ‘하야 요구’의 근거가 될 게 뻔하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하자 ‘유신부활’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물론 통합진보당과 그 지지단체들로부터다.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 논란’ 끝에 사직서를 내니까 똑같은 말, 즉 ‘유신부활’이 민주당 측과 그 지지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이 역시 박 대통령에 대한 근원적 부정어다. 대통령으로서 인정하기 싫다는 것이다.

하긴 박 대통령만이 겪는 일은 아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신권위주의’ 주장이 요란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MB독재’라는 피켓이 시위 때마다 등장했다. 그리고 이젠 더 나아가 ‘유신부활’이다.

촛불집회는 일상화해서 이젠 서울의 풍속도가 되었다. 야당의 천막당사와 야당 대표의 노숙침상도 조금 더 시일을 끌면 서울의 명물 목록에 등재될 법하다. 서울광장, 청계천광장에서 긴장감을 갖게 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참여자 외에는 정치적으로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그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광장의 시민들과 정치인들이 국가기관 해체, 대통령 밀어내기 퍼포먼스를 즐길 수 있는 배경에는 나름의 확신이 있다고 본다. 그건 ‘독재’ 혹은 ‘유신’이 결코 재연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다. 그래서 표정이 각박하지 않고 여유로울 수 있는 게 아닐까?

온갖 다양한 요구가 쏟아지는 것도 민주주의의 한 양상이고 단면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과연 ‘민주주의’의 탑은 무한정 높이 쌓을 수 있는 것인가? ‘민주주의’의 성은 아무리 훼손하려 해도 절대로 허물어지지 않는 철벽일 수 있는가? 영일 없는 정치적 내분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절대로 후퇴하는 법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신탁이라도 있었는가?

우리는 혹 ‘민주주의 이상의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이 혼란스러워진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아득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동양의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 민주, 자유 등의 가치가 결핍되었던 때를 되돌아보면서 이의 과잉 또한 똑같은 폐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할 일이다. ‘절제’는 언제나 미덕이다.

효과적으로 유지 관리할 수 있는 이상의 민주주의를 누리려는 것은 과욕이다. 과욕은 화를 부른다. ‘민주주의’란 의외로 허약한 제도 가치 신념의 체계일 수 있다. 바이마르헌법 체제를 허물어뜨린 히틀러가 ‘총통’제를 내걸었을 때 독일 국민은 90% 찬성으로 승인했다. 극단의 경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준엄한 교훈이다.

아주 어렵게 얻은 것이라면 아끼고 또 아껴가며 써야 한다. 왜소한 정당들이라면 모르겠거니와 집권 경험까지 가진 거대 제1야당이 민주주의의 낭비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이 민주당은 국회법상 새누리당과 쌍두마차를 이루는 의정의 주도세력이다. 그런데 좌절감 절망감을 과장하며 광장에서 소리나 지르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민주당은 바로 털고 일어나 국회로 돌아갈 일이다. 그리고 국회의 주인으로서 대화하자고 찾아오는 청와대 손님을 맞아 서로 국리민복의 길을 묻고 대답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게 집권을 겨냥하는 정당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되찾는 길이자 국민에 대한 도리일 것이다.

이진곤 논설고문·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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