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걸기-한승주] 충무로 제작자 전성시대 기사의 사진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저녁, 좀처럼 보기 드문 훈훈한 자리가 마련됐다. 올여름 500만 관객을 모은 한국영화의 제작자를 축하하는 모임이다. ‘설국열차’ 같은 대작 말고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경험이 거의 없는 감독들이 시나리오와 기획으로 승부해 500만을 넘은 영화라서 더 의미가 있었다.

‘숨바꼭질’ ‘더 테러 라이브’ ‘감시자들’이 바로 그 영화들이다. 이날의 주인공은 제작사 ‘씨네2000’의 이춘연 대표(더 테러 라이브), ‘스튜디오 드림캡쳐’의 김미희 대표(숨바꼭질), ‘영화사집’의 이유진 대표(감시자들)였다.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에서 마련된 이 자리는 생각보다 크고 화려했다. 모임의 주최자는 영화계의 ‘큰 어른’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 지금의 부산국제영화제를 있게 한 그는 우리 영화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개인 돈을 털어 그동안 고생하다 빛을 본 제작자들에게 밥을 사는 자리를 마련하자 많은 영화인이 함께했다.

이 자리에는 신영균 대종상영화제 명예이사장, 임권택 감독, 배우 문희 강수연, 전주·부천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한국영상자료원장 등도 같이했다. 김 위원장이 학장을 맡고 있는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학생들도 초대돼 한쪽 테이블에서 ‘유명 인사’들을 보며 미래의 꿈을 키웠다. 한국영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 뜻깊은 자리였다.

김 위원장이 이춘연 대표를 소개하면서 “이 양반이 20년 동안 영화를 만들면서 500만 넘은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하자 진지하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풀렸다. 김미희 대표에게는 “그동안 말아먹은 영화가 많았는데 이번엔 잘됐다”고 격의 없는 덕담을 꺼냈다.

이춘연 김미희 이유진. 이들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할지 몰라도 영화계에서는 ‘건축학개론’의 심재명 명필름 대표와 함께 이미 스타 제작자들이다. 이춘연 대표가 없다면 ‘더 테러 라이브’가 나올 수 있었을까. 도무지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쁜 배우 하정우에게 시나리오를 읽어보라고 끈질기게 권유해 캐스팅한 이가 그였다. 아들 친구인 김병우 감독의 시나리오를 보고 데뷔도 안 한 그에게 과감하게 연출을 맡긴 것도 이 대표였다.

‘숨바꼭질’ 뒤에도 김미희 대표가 있었다. 이미 다른 영화사로부터 퇴짜를 맞은 시나리오, 서른두 살 신인 허정 감독, 연기력이야 말할 것 없지만 데뷔 23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 주연을 맡은 손현주. 김 대표의 뚝심이 없었다면 한국 스릴러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숨바꼭질’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김병서 조의석 감독이 공동연출을 맡은 ‘감시자들’도 마찬가지다. 김 감독은 촬영감독 출신, 조 감독은 중고신인이었지만 시나리오에 확신을 가진 이유진 대표는 이 영화를 밀어붙였다.

이들은 충무로에서 20년 이상 버텨온, 경험 많고 노련한 ‘역전의 용사들’이다. CJ나 롯데엔터테인먼트 같은 대기업도 함부로 못한다. 자본에 휘둘리기 쉬운 신인 감독에게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셈이다.

제작비 100억원이 넘게 들어간 ‘설국열차’와 ‘관상’의 흥행 질주도 반갑지만, 20억∼50억원 규모 영화의 500만 돌파도 뜻깊다. 홍상수 감독의 예술영화 ‘우리 선희’의 3만명도 의미 있다. 다양한 층위의 작품들이 조화롭게 움직여야 영화 생태계가 잘 돌아간다. 오랜 경험과 기획력으로 봄날을 맞은 이들 제작자에게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한승주 문화생활부 차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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