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두려움보다는 사랑받는 리더십을 기사의 사진

“대통령 귀가 편해지면 그만큼 ‘국민의 사랑과 신뢰’라는 리더십 기반 약화된다”

태상하지유지(太上下知有之) 기차친이예지(其次親而譽之) 기차외지(其次畏之) 기차모지(其次侮之). 도덕경 제17장에 있는 말이다.

‘태상’은 요(堯)와 순(舜)의 경지다. 현실 세계에서의 최상은 ‘친이예지’의 리더십일 것이다. 이는 백성 또는 국민에 대한 염려와 사랑, 그리고 공감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개는 ‘외지’, 즉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쪽으로 치우친다(그러다 모지, 즉 아랫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 처지로 추락하고 말지만…).

군주정치나 전체주의적 통치 체제 하에서는 ‘외지’의 리더십이 통한다. 그런데 민주국가의 ‘대통령 권력’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5년 단임의 임기 동안 효과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려면 국민과 정치권으로부터 공감과 사랑을 받는 리더십, 청와대 측근과 내각 구성원들로부터 자발적 충성심과 일체감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긴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남달리 넓은 품’이 기대됐으나 아직도 ‘레이저광선’ ‘얼음공주’의 잔영이 남아 있다. 냉철함은 승부사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대통령에게는 부담이 되고 만다. 대통령의 귀가 편해지면 그만큼 지지기반은 약화되는 법이다.

박 대통령의 경계심이 지나치게 작용하는 탓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는 정상에 앉았고 가장 무거운 책무를 짊어졌다. 다투어 손을 잡으려던 국민의 그 사랑이 의심과 두려움으로 바뀌지 않게 해야 한다. 정치권으로부터는 정직하고 편안한 대화상대로, 정부 안에서는 따르고 싶은 기수(旗手:박다르크라는 애칭 그대로), 그리고 보호자로 인식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리더십을 재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청와대, 정부의 요인들과 정치권 리더들 또한 여성 대통령 시대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고 있는 인상이다. 대통령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겠으나 남성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점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문인이자 대정치인이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여왕의 다른 고문은 자주 교체되는데,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오랫동안 총애를 받으며 모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디즈레일리가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폐하를 중성(中性)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성으로 대하고 있습니다.”(세계인의 유머, 장수철 편)

대제국의 통치자도 인간이다. 밖으로는 신하나 백성의 범접을 불허하는 위엄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내면의 인간성은 어느 누구와도 다르지 않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남에게 잘 보이고 싶고, 때론 샘도 낸다. 내면까지도 위엄으로 채워졌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거나 신상(神像)이다.

여성 대통령을 상대하는 야당의 자세로 말하자면, 민주당 지도부는 너무 인색했고 지나치게 경직됐다. 이명박 대통령 때의 촛불시위는 효과적인 압박수단일 수 있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경우는 그럴수록 경계심의 벽을 더 높일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어야 했다.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대장부들의 배포와 도량이 그리 적어서야 어떻게 국가경영의 대도를 볼 줄 알겠는가.

채동욱 전 검찰총장 또한 애초부터 상황을 잘못 인식했다. 신문보도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와 관련해서 박 대통령이 가장 먼저 떠올렸을 사람은 아마도 ‘채 총장의 혼외자’로 지목된 소년이었을 것이다. 그게 여성성 즉 모성의 본능적 반응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채 전 총장은 ‘검찰 흔들기’에 대한 의구심부터 드러냈다. 임명권자 이전에 여성으로서 분개하지 않았을까?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소동 때 그 피해자가 어린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단호한 조치를 취했던 것처럼.

대통령은 대통령답고, 공직자는 공직자답고, 정치인은 정치인다운 나라이기를 소망한다. 다 아는 ‘공자말씀’ 왜 하느냐고 하겠지만 이를 경시하고 망각하기 일쑤인 ‘높은 분’들의 ‘정치하는 방식’이 아슬아슬하고 답답해서 하는 말이다.

이진곤 논설고문·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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